(적황) 내일 네가 부서진대도
벚꽃전선이 슬슬 물러날 즈음이었다.
4월, 키세 료타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를 둘러싼 세계는 크게 바뀌었다. 도쿄에서 카나가와로 거주지를 옮긴 그는 자취를 시작했고, 종반엔 거의 자주 참가였던 중학교 농구부와 달리 이곳은 매일 필수 참가─철저한 체육계의 세계였다. 이기면 다였던 테이코와는 달랐다. 이길 수만 있다면 뭘 하든 괜찮다는 식으로 다른 사정을 봐주지도 않았고, 그를 경원시 하지도 않았다. 그냥 건방진 신입생. 그렇게 다가와준다. 그런 감각이, 낯설었지만, 싫지 않았다. 부원들의 불화로 부활동을 줄인 것과 반비례해 늘렸던 모델일을, 다시 줄이기 시작했다. 도리어 이쪽에서 키세의 사정을 봐주고 있는 형국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순식간에라도 그를 두고가버리는 세계였지만, 현재로써는 그렇게 어리광 부릴 수밖에는 없었다. 눈을 뜨는 새벽부터 자취방에 돌아오는 늦저녁까지 농구만을 생각할 수 있는 생활이 다시 찾아온 것이, 마냥 기뻤다. 그런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질 무렵, 그 메일이 온 것이었다.
제목 ·우산을 가져가
날짜 ·yyyy/mm/dd 06:52
우산을 가져가.
벚꽃전선이 슬슬 물러날 즈음이었다. 화창하게 개인 아침. 맨션의 현관문을 잠그고 열쇠를 든 오른손으로 운동화의 뒷굽을 빼면서,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조작하던 키세가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었다. 보통 올리가 없는 시간에 온 메일인지라, 혹여 선배들에게서 급한 연락이라도 들어왔나 해서 확인했던 것인데.
등록되지 않은 메일 주소.
우산을 가져가.
키세는 손차양을 만들며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재차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그냥 무시하거나, 아니면 냉큼 우산을 집어왔으면 좋았을 것을. 왠지 그 메일의 지령대로 우산을 가져가야할 것 같은 기분과 동시에 누가 보낸 건지도 모르는 메일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별로라는 반발심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결국 평소보다 두 대 뒤의 전철을 탄 키세는, 지각한 벌로 운동장을 다섯바퀴 뛰고서야 체육관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러나 무정한 하늘은 오후 연습이 끝날 무렵까지도 쨍했다. 여름하늘처럼 너무 쨍해서 오히려 언제 소나기가 내려도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날씨라기보다는, 하늘이 맑고 공기가 산뜻한, 그런 봄날씨였다. 창문을 열어 둔 부실엔, 방금까지 체육관을 뛰다니던 몸은 다 큰 남자애들의 열기를 선선히 식혀주는 기분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아, 혹시 카사마츠 선배임까?
아아?
막 교복셔츠 소매에 팔을 꿰던 카사마츠가 돌아본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그렇게 써 있는 얼굴이었다.
아니예여?
뭐가?
아, 그게여, 아침에 메일이 왔는데, 그게 좀 묘해서.
어차피 여자겠지.
뭐야, 여자애라고?
…왜 그걸 주워들으실까….
머리에서 물기를 털어내며 모리야마가 다가왔다. 카사마츠는 이미 흥미를 잃은 듯 로커에 붙은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메고 있었다.
예쁘냐?
여자애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요.
사진 있어?
아이, 사람말 좀 들어주세요! 사진 없슴다! 애초에 누군지도 모른다구요!
뭐야, 스팸이야? 잘못 온 문자?
뭐가 묘한데?
아 그게요…….
일련의 일을 설명하자, 카사마츠가 흐응,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오늘 연습에 늦은 경위라 이거군, 하더니, 이어서.
그거야 네가 여기저기 번호를 흘리고 다니니까 일어나는 불상사잖아!!
갸아아악!!! 아파여 아파여 아파여 아픔다!!!
갸악이 아냐 멍청한 자식아!! 하다못해 번호를 땄으면 기억을 하던가!!
제가 따는 게 아닌데!! 오히려 따이는 건데에!!!
…!! 자랑하냐!!
기염을 토하며 등짝을 후려차는 것이었다. 거기에 왠지 열받은 모리야마까지 헤드락을 걸기 시작해서, 막 샤워를 마치고 들어온 하야카와가 키세 죽슴다!! 기도 눌(려)서 숨(넘)어 간다구요!! 하며 뜯어말릴 즈음에야 키세는 해방되었다. 숨을 고르는 와중에, 이(런) 놈 때문에 선배들(을) 살인자(로) 만들 수는 없슴다, 하는 하야카와의 말은 못 들은 것으로 쳤다. 키세는 눈물을 닦으며 항변에 나섰다.
진짜로 아님다 일신의 결백을 주장함다 흑큽.
…………….
흐엉 저 진짜 억울함다아.
…………….
제가 인기가 많다보니까 저 나름대로 구별을 두기 위해서 여자애들한테 알려주는 메일주소는 따로 만들어 놨단 말이예여.
…………….
어라? 어라? 오히려 아까보다 분위기가 나빠진 것 같은데 착각인가? 눈물의 호소가 그다지 먹히지 않은 것 같은 분위기를 찰지한 키세가 두리번거리자 코보리가 약간 곤란한 눈치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얘, 얘기나 들어보자고. 어? 그 말에 부실의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코보리선배는 천사야…!
그러니까 이거 절대로 제가 번호 알려준 건 아님다!
근데 뭐가 묘한거야? 그냥 잘못 온 거 아니냐?
키세, 한 번이면 실수일지도 모르겠지만, 혹시 스토커일지 모르니까 수상쩍으면 바로 신고해라.
아니 그래도 일기예보 확인하고 우산을 가져가라는 스토커가 있을까, 보통.
성선설주의자인 코보리가 온건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 때 모리야마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어? 일기예보에 오늘 비 온댔냐? 동시에, 열린 창문 너머로 빗줄기가 쏴아악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동은 입을 다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 * *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 날 비가 온 곳은 카나가와뿐이었다. 키세와 코보리가 가져온 우산은 나름대로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우산 두개에 카사마츠, 모리야마, 하야카와, 뒤늦게 샤워를 마친 나카무라까지 붙어서 전철역까지 걸어야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비맞은 쥐꼴이 되었지만.
잘못 온 메일일 것이라는 모리야마의 예측과는 달리, 메일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몇일 후의 아침. 그 날은 주말이라 연습은 오전뿐이고 오후부터는 지면광고촬영 일정이 잡힌 날이었다. 이르게 잠자리에 든데다, 딱히 어딜 놀러 나갈 것도 아니면서 햇볕좋은 주말이라는 사실에 묘하게 들떠 일찍 눈이 뜨인 아침. 나갈 준비를 다 마치고도 시간이 남아 일기예보를 체크하고 있을 때였다. 환한 꽃무늬가 프린팅 된 기상캐스터 누나의 원피스가 더욱 봄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캐스터 누나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전국적으로 대체로 맑고 따뜻한 봄날씨를 보이겠습니다. 다만 칸토코신지역은 꽃가루 주의보가 내려져있으니 알러지가 있으신 분은 외출을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 밖에 토카이 지역과 킨키지역은……
거기까지 듣고 키세는 일어섰다. 키세는 꽃가루 알러지가 심한 편이었다. 키세가 더듬더듬 약상자를 더듬어 가끔 변장에 썼던 마스크를 찾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의 착신음에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확인해보니 아니나다를까.
꽃가루가 심하다니 마스크를 챙기도록.
…말하지 않아도 챙겼다구요. 키세는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가방에 쳐넣었다. 그래도 한 손에는 마스크를 챙겼다.
* * *
키세의 무응답에도 지치지 않고 메일은 빈번하게 도착했다. 첫번째 문자와 마찬가지로 오후부터 비가 올테니 우산을 챙겨가라는 내용부터, 일과 후의 스트레칭은 빼먹지 말라느니, 주말이라도 너무 늦게까지 자진 말라느니,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하라느니, 댁은 혹시 내 엄맙니까하고 묻고 싶을 정도의 잔소리들이었다. 물론, 그 잔소리란 듣기 거북한 지당한 말을 의미했다. 키세는 왠지 탐탁찮으면서도 모두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제목 · 연습시합
날짜 ·yyyy/mm/dd 21:13
수고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발신인은, 키세의 일정을 파악하고 있다. 문자가 도착한 시간만해도 그렇다. 노린듯이 키세가 자택에 도착하자 왔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키세는, 혹시 몰래카메라가 있는 게 아닌가 온 집안을 샅샅히 뒤졌던 어느 주말을 떠올리며 신음을 했다. 물론 일정을 파악하고 있다, 곤 해도 키세의 주변사람이면 이 정도는 아는 게 당연한 정도만을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잠시 휴대폰을 노려보던 키세는, 이내 답장버튼을 눌렀다.
누구심까?
그 한 마디를 십대답게 재빠른 엄지로 찍어내고, 곧장 송신버튼을 눌렀다. 메일이 온 지 2분만에 답장을 했으니, 아직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을 가능성은 높다고 키세는 생각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일과를 끝냈을 9시. 물론 메일의 발송인이 그대로 곯아떨어져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에 걸었다. 휴대폰과 눈싸움하기를 십여분, 답장이 도착했다.
이런 메일에 답장하다니 안이하구나. 내가 스토커일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나?
그 뻔뻔한 문면을 확인한 키세의 어이가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아니 그걸 당사자인 당신이 물어서 어쩔거야? 그렇게 대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꾸욱 눌러참고 이성적으로 답장했다.
아니 그 전에 어떻게 제 번호를 아시는 검까? 아니, 누구세요?
그러나 30분이 경과해도 메일은 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쳐 목욕을 마치고 왔는데도 메일이 없는 것을 확인한 키세가, 실망해서 휴대폰을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팝업창이 떴다.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열람버튼을 눌렀다. 타이틀은 '나는'. 그리고 내용은.
제목 ·나는
날짜 ·yyyy/mm/dd 22:46
난 네 팬이야.
그 시점에서 키세가 110번을 누르지 않은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스토커라고 하기엔 정황이나 증거가 빈약했다. 이 발송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저 메일을 보내는 것으로만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딱히 키세에게 직간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둘째, 그 메일 내용이라는 게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엄마와 매니저의 중간쯤 존재가 생긴 것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메일의 내용에서, 이미 잘못온 메일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보내는 메세지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어떻게 제 번호를 알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결정적으로 셋째. 키세가 개인적인 연락처로 쓰는 메일주소를 아는 사람은 정해진 몇몇 사람뿐이었다. 대충 손가락을 꼽아보면 후보가 추려질 정도로. 그러니까 어차피 그 중 한 사람인 것이다. 만난다면 법정이나 면회실이나 조정실이 아닌 곳에서 만나는 게 좋다. 그렇게 생각했다.
뭐예여, 그게. 장난치는 검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아핫, 제 팬이었슴까~? 하고 명랑하게 답장해주지 못한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어차피 통상적인 팬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런 주제에 팬을 자청하다니 불쾌했던 걸까. 스스로도 감정의 원인을 짚어낼 수가 없어서, 그렇게 찍어내보내고 나서 휴대폰은 그냥 침대맡에 던져두고 전등불을 껐다. 조용한 맨션이 어둠에 잠겼다가, 이내 액정의 불빛으로 환히 밝혀졌다. 내키지 않는 손으로 메일을 열어보았다.
장난을 칠 생각은 없다만.
답장은 하지 않은 채 휴대폼을 접어 도로 머리맡에 던졌다. 액정의 불빛이 잠시간 천정을 비추다가 이내 꺼졌다. 그러자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조명의 전부였다. 그 날 밤 휴대폰의 램프가 깜빡이는 일은 없었고 메일은 다시 오지 않았다.
* * *
그 후 성격에도 안 맞는 일기예보 확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습관이 되어버렸다. 이게 다 그 메일때문이었다. 키세의 무응답 이후 메일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킨키에서 홋카이도는 낮까지는 대체로 맑겠습니다만, 차츰 구름이 많아지면서 오후부터는 비가 오는 곳도 있겠습니다. 오키나와는…
일기예보는 끝나간다. 오늘도 메일은 없다. 오하아사가 시작될 때까지 휴대폰을 노려보던 키세는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글자를 찍어내기 시작했다.
우산 챙겨가요. つ [우산☂]
송신버튼을 누르고 큰 한숨 한 번. 아침엔 누구나 바쁜 법이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답장은 금방 왔다. 제목, 고마워. 내용은 짧았다.
고마워.
덕분에 비를 맞지 않겠네.
왜인지, 얼떨떨하게 웃고 있을 발신인의 표정이 떠올라 키세는 쓴웃음 지었다. 무슨 생각인지, 무슨 의도인지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 장난에, 조금만 어울려줄까.
거짓말쟁이.
정말이야.
* * *
오늘도 부활동 수고했어.
수고하셨슴다~! ヾ(@^∇^@)ノ
아, 전부터 궁금했는데 이거 예약메일임까? 매일 거르지도 않고 오네요.
답장은 금방 왔다.
예약메일? 그게 뭐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씻고 자도록. 내일도 아침 연습 있잖아.
……아, 네, 넵. (゜∇ ゜)>
* * *
오늘도 수고했어.
수고하셨슴다~! ヽ(・∀・*)ノ
뭐랄까 요즘은 이 메일 없으면 하루가 안 끝난 기분이 듬다.
이걸 뭐라고 하는 거더라? 게슈탈트의 고양이같은?
…그걸 말하자면 파블로프의 개겠지만…. 그것과도 좀 다른 듯하다는 건 차치해두고….
내가 가장 궁금한 건 어떻게하면 게슈탈트 붕괴와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파블로프의 개를 모두 헷갈린 다음 게슈탈트의 고양이라는 말이 나오냐는 거야.
…카이죠에서는 낙제같은 게 없는건가? 아, 아직 중간테스트 전이던가.
네? 슈르…? 프…프라블럼? 에? (゚□゚;)
…다음 너희 주장을 만나면 부족한 것이 폐를 끼친다고 꼭 말씀드려야겠어.
에엣, 부족한 것이라니 그렇게까지 말 할 필요는 없잖슴까!
좀 더 자기자신에게 자신을 가지세요! o(`・ω・´)o
혹시 모를까봐 굳이 말해주자면 네 얘기야.
엣.
* * *
부활동 수고했어.
오늘은 화보 촬영도 있었슴다! (ㅠ▽ㅠ)
아 참 다음달에 나오니까 제 팬이라면 요체크!☆★ ('▽ <)b~☆
그래. 수고했어. 여전히 열심이구나, 모델.
흡... 스루스킬이 철벽임다... 뭔가 제 말 반 정도는 흘려듣고 있지 않슴까?
일단은 팬이라면서...(;´Д⊂)
는 그렇다치고 그야 당연하져 다들 좋아해주는데!
이래뵈도 나름 유망주라구여? ψ(`∇´)ψ 우후후후후
물론 농구가 더 좋긴하지만여~! (*^ワ^*)
정말로 농구를 좋아하는구나.
그야 가짜로 좋아할 린 없잖슴까~?
과연, 그건 그렇네. 슬슬 내일 준비하고 자도록.
……저, 혹시 뭐 잊지 않으셨슴까? ( ´・ω・)
? 덮다고 이불 걷어차다가 감기 걸리지 말고, 제대로 덮고 자도록.
그게 아니…흥 됐슴다. 좋은 꿈꾸세여!
그렇게 보내고나자 23시 58분이었다. 들을 사람도 볼 사람도 없건만 보란듯이 삐친 티를 내지 않고선 배길 수 없었다. 일부러 콧방귀를 뀌고 휴대폰은 침대맡에 던졌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휴대폰에 등을 돌렸다. 그대로 잠들어버리려고 했는데 금세 휴대폰 진동이 침대를 울린다.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던 이불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냐, 방금 메일 보냈는데 이렇게 금방 올리가…. 어차피 다른 사람이겠지, 응, 아닐거야…. 봐봤자 시간낭비일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은 멈추지 않고 휴대폰으로 손을 뻗는 키세 료타가 거기에 있었다. 플립을 열어보자 23시 59분. 아직 안 늦었다. 쓸데없이 고동치는 심장에게는 변명할 말도 없었다. 바보구나. 그게 제목이었다. 뭡니까, 사람한테 바보라니, 하고 반론해주려고 생각하면서 메일을 열어보자.
기억하고 있어. 오히려 잊어버릴 리가 없잖아.
생일 축하해.
* * *
내일도 아침부터 연습시합이지? 아침 거르지 말고,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음식 먹지도 말고. 일찍 일어나서 제대로 집에서 조식 취하고 갈 것. 너는 식사가 빠른 편도 아니니까.
아핫, 오늘은 늦었네여!ヾ(@^▽^@)ノ 이만 자려고 했는데.
저기 저기, 부원, 아니 친구들한테 메일할 때도 그렇게 딱딱하게 말해여?
음? 딱딱한가? ...너처럼은 할 수 없어.
그야 저처럼 상큼하진 않아도~!
뭐랄까, 이렇게, 이모티콘같은 건 써보는 게 어떨까여?
부원들도 좋아할걸여?
이모티콘? 이렇게 말이야? ㅡㅡ
아앗 왜 그렇게 삐딱하게 나가심까!
네 충고를 따르고 있을 뿐이다만 ㅡㅡ
전 그 이모티콘 넘넘 싫슴다! (`Д´)
다른 걸로 해주세요!
그럼 이렇겐가? ●▽○ 8<
그…누누누누가 그런 이모티콘을 쓰는 검까 대체!
좀 더 귀여운 거 많잖아여!
이렇게 하면 되나? v(°∇^*)⌒☆
ㅋㅋㅋㅋㅋ그건 너무 귀여워서 안 됨닼ㅋㅋㅋㅋㅋㅋ
호오, 과연 제 전문영역 이야기에서는 제법 까다롭게 구는구나.
그럼 이렇게 하면 되나? ・+(*゜∀゜*)+・
ㅋㅋㅋㅋㅋㅋ으악 복근 끊어지겠어욬ㅋㅋㅋㅋㅋ
웃기려고 하는거죠? 웃기려고 하는 거 맞죠?
나는 언제나 진지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살려주세요ㅋㅋㅋㅋㅋㅠ▽ㅠ
살려달라니 호들갑스럽긴. 이건 마음에 들어? ヽ(∀`ヽ●)(ノ●´∀)ノ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면 그런 걸 부원…이 아니라 친구들한테 보내면 네 이놈 가짜녀석! 우리 ○○을 돌려내! 라고 할 지도…….
……시간이 늦었다. 이만 자도록.
* * *
시합 수고했어.
.
.
.
벌써 자나?
.
.
.
체력소모가 심했을 테니 무리도 아니지.
어제 시합으로 소모한 건 확실히 보충해둬.
……네 여름은 끝났지만, 겨울이 있으니까.
.
.
.
……설마하니 이 시간까지 자는 건 아니겠지.
.
.
.
괜찮은거야?
.
.
.
아핫 죄송함다! 깜빡했네요 헤헤. 너무너무 피곤했거든요. 여러모로?
시합 직접 보러……왔을 린 없죠? (^^ゞ
아아, 그래. 정보반에서 영상을 받았어.
다음부턴 직접 보러와주면 좋을텐데.
……팬이라면서.
글쎄.
…네가 엉망진창으로 우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은 걸.
~~~~!! 다, 다음엔 안 짐다!
아오미넷치도 쿠로콧치도 카가밋치도 전부 리벤지임다!
이제부턴 연습만이 있을 뿐! 아자아자! p(`・ω・´)q
기대할게.
그렇다고 오버워크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 * *
해바라기 사진이었다.
예의 그 팬에게서 온 메일에 첨부되어있었다. 그러고보니 해바라기가 필 즈음인가. 그야 여름인걸. 그것도 그렇다. 어느 새 계절을 달력의 일정과 로드워크할 때의 체감온도로만 느끼게 되었던 걸지도 모른다. 화면의 스크롤을 내리자 메세지도 첨부되어 있었다.
탈수증 조심해.
푸크흐흡. 순간 들이키던 포카리를 뿜은 키세에게 팀메이트 선배들에게서 따가운 질책이 쏟아진다. 연습중에 휴대폰 들여다 보지말라는 지당한 말씀부터 더럽게 왜 그걸 뱉고 난리냐는 구박까지. 애정어린 핍박속에서 확인한 메일은 그게 다였다. 어느 새 런닝하느라 거의 뒤집어쓰다시피 흘린 땀이 식은 것을 키세는 느꼈다. 뭐야, 이 사람은. 닌자의 후예? 아니면 천리안, 뭐 그런 건가, 하면서 플립을 닫으려던 순간. 화면 옆에 스크롤바가 남아 있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스크롤을 내려보자 두 마디가 더 있었다.
염분섭취도 잊지말도록.
아아. 키세의 얼굴에 울듯말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어쩜 이렇게 서투를까. 우리는.
* * *
여름방학도 끝인데 어디 안 놀러 갔슴까~?
글쎄. 인터하이나 부활동에 매진하다보니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는걸.
에엣 재미없어( ̄^ ̄ ) 인생은 좀 더 즐기면서 사는검다~!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각각이지 않을까한다만. 네 방학은?
저에게 그걸 묻는다면! 체육관에서 피서했다고 대답하는 것이 인지상정! ('▽<)b~☆
숙제는 끝냈겠지?
그럼여! 완벽함다! 선배들이 봐줬거든여! ('▽<)v~☆
앗 그러고보니 놀러갔다 왔슴다! 선배들이랑 축제갔다왔었던 거 있죠!
……호오. 잘됐구나.
* * *
올해 겨울은 평년보다 춥다고 하더군.
오늘부터는 외투를 입는 게 좋겠어. 저녁까지 연습이지?
음~~ 아직 카나가와 그렇게 춥지 않슴다.
그 쪽은 벌써 아침저녁으로 싸늘한가여? 아, 카나가와가 먼저 추워지던가여? 어느쪽이더라…?
아니, 이쪽도 아직 괜찮아.
이번주부터 동복은 입기 시작했다만.
아, 우리도!
그치만 아침저녁으로 로드워크하고 있으니까 감기 걸릴 틈이 없는 거 있죠. ('▽<)b~☆
그런 의미에서 아직 괜찮슴다~☆ 데헷
호오, 그래서 내 말을 무시하겠다?
엣.
내가 하는 말은?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잘했어.
으우 (;´Д⊂)
잘 입고 다니는지 수시로 확인할 거니까 말이야.
정말 어떻게 알고 있는 검까? 누구한테 물어보는거예요?
그건 말이야…………기업비밀.
에엣.
* * *
생일 축하함다!
23시 59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날짜가 다 지나가도록 키세는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 * *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매니저의 운전으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메일을 확인한 키세는 저도 모르게 우오옷, 하고 모델답잖은 소리를 냈다. 생일 축하메세지에는 꿈쩍도 않더니 의외로 크리스마스는 챙겨주시는 팬님이시다…비록 이미 열 두시는 지났지만. 키세는 이 '팬'의 선이 어디쯤에 그어져있는지 잘 파악하진 못했지만, 천성이 들이대고 보는 성정인지라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는 키세를 백미러로 흘긋 본 매니저가, 너 그런 거 좀 신경 쓰지 그러냐, 일단은 유명인이니까, 하고 부루퉁하게 말한다. 그러면서도 입은 웃고 있는 걸 키세는 놓치지 않았다. 왜요, 요즘은 캡모에가 유행하지 않슴까. 실실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어디선가 빠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하고 자동차가 급정거하더니, 뒷좌석의 키세에게 곽휴지가 날아왔다.
멍청아 갭모에다, 갭모에!! 캡모에는 무슨 모에냐 대체! 뭐에 모에하는거냐 빙신아!!!!
* * *
자기가 불러놓고 늦는 사람은 대체 뭘까여?
글쎄. 사정이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냥 원래 그런 사람이려니 포기하는 게 좋아.
음~ 그런 건가요? 방금 친구한테도 그런 얘길 들었슴다. 역시 둘이 통하는 데가 있네여!
.........................역시라는 건 뭐야?
* * *
몸은 어때?
앗 우리 주장선배도 그거 물어봤었는데 신기하네여!
괜찮슴다! 완전 베스트 컨디션! (*^o^*)
…그렇겐 보이지 않았다만.
진짜임다!
다들 걱정도 많으셔(;・∀・) 하여간 다들 날 너무 좋아한다구요.
……………라는 건 농담.
저, 하나 물어봐도 괜찮아요?
해 봐.
……….
……….
아, 아님다.
역시 관둘래.
왜 그래? 신경쓰이잖아.
에헤헤 재성함다~! 잊어주세여! (* ゚▽゚)>
오늘 힘내세여! 결승전에서 봐여! ヾ(>ω<○)
이기고 와.
* * *
멘션에 도착해서야 간신히 혼자가 된 키세는, 문이 닫힌 현관에 그대로 다리를 펴고 앉았다.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이 났다. 바보같아. 나 바보같아. 집에 박혀서 훌쩍 훌쩍 울고 있으면 담가버린다 멍청아라는 선배들의 당부를 열두번도 더 듣고 온 뒤라 그랬는지(선배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그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제일 울고싶은 건 선배들일텐데. 좀 더 같이 하고 싶었는데. 아무도 말하진 않았지만 내일의 3, 4위전은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누구나 알았다. 내일 하루만이라도 뛸 수 있다면, 하는 걸 지난 몇 시간 동안 몇 백번도 넘게 생각했다. 소풍가는 걸 너무 기대한 나머지 열을 내버리는 어린애같았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스포츠백에서 튀어나온 휴대폰 램프가 깜빡인다. 두어번 깜빡이더니 잠깐 시간을 두고 다시 깜빡거린다. 어두컴컴한 실내에서 광원이라곤 그뿐이었다. 무릎에 코를 묻은 채로 키세는 휴대폰 램프가 점멸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눈물을 멎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잠잠해졌던 휴대폰이 다시 깜빡거린다. 혹여 집이나 사무소에서 오는 급한 연락일까봐 키세는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그리고 플립을 열자,
수고했어.
그 한 문장이 키세를 반겼다. 그거면 되었다. 그게 다였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과분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듣지 않고 오버워크따윌 하다니 배짱이 좋구나. 용서하지 않을거야. 각오 해둬. 진찰은 받아. 그렇다고 내일 시합에 나갈 것은 꿈도 꾸지 말아. 내일은 얌전히 벤치에 앉아서 어떤게 승리라는 건지 배워두는 게 좋을거야.
…아아. 이래서 손이 많이 가는 막내는 정말 곤란해.
…하지만 싫어지지 않는다는 게 더 곤란하니 큰일이지.
명령과 협박의 온퍼레이드인 문장들이 키세를 울렸다 웃겼다 하느라 바쁘다. 엄격하게 말하다가도, 어느 순간 풀썩 제 앞에 주저 앉아서 쓴웃음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그가 눈 앞에 있는 것만 같아서 눈을 감는다. 아아, 왜, 나, 이런 사람을. 우리는, 왜 이렇게.
나는 내일도 이길거야. 물론 내일뿐만 아니라 앞으로 계속 그럴거야.
응, 그렇겠지. 당신은 계속 그럴거야. 내일도 이기고, 앞으로도 이길거야. 다들 그런 당신을 대단하다고 하겠지. 나도 그랬는걸. 하지만 사실은. 나, 알았어요. 사실은─────. 스크롤을 내리자, 천상의 말씀이 떨어졌다. 이 놀이의 마지막을 고하는 말이.
료타,
모든 게 끝나면 할 얘기가 있어.
내일 네가 부서진대도
내일 만나자.
2014.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