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후지) 가을이 오는 길
뜨거운 해를 식히며 부는 것은 벌써 가을바람이었다. 머리카락을 흔드는 바람에 김수겸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늘이 벌써 저기까지 높아져 있었나. 걷는 것도 잊어버리고 하늘을 올려보고 있자, 자기가 안 따라오고 멈춘 걸 안 선배가 앞서가다가 되돌아와서는 괜찮냐? 너 또 머리… 하고 지레 놀란다.
“아니요, 그냥 바람 부니까 시원해서요.”
가까이 와서 얼굴을 들여다보는 선배에게 손을 젓자, 선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걱정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김수겸 역시 심준섭이 부상을 당하면 이런 심정일 거라고 추측은 하지만-그렇게 큰 부상도 아니고…얼마전에 실밥도 빼고 이제 정말 괜찮다는데.
“괜히 또 무리하지 마라, 너.”
궂이 안 쫓아와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더럽게 말도 안 들어. 들으란 듯이 투덜거리는 선배의 등을, 김수겸은 못 들은 척 하면서 묵묵히 따라 걸었다.
능남에 연습시합을 신청하러 다녀오는 길. 원래라면 감독이 해야할 일을, 선수가 직접해야 한다. 아니, 이젠 그저 선수라고만도 할 수 없겠지만. 선배들은 이미 은퇴했으면서도 변해버린 농구부의 상황과 얼마 전에 있었던 김수겸의 부상 때문에 뭐든 도와주려고 애를 쓰신다. 현역으로써는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이도 어찌돼었든 김수겸이 감독으로써 해야할 일. 은퇴한 주장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코치라는 명목이라고 해도.
아무 말 없이 체육관 뒤의 그늘을 빠져나가, 운동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수겸이 형!”
돌아보자 체육관 그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수돗가에 등을 꼿꼿히 세운 장신이 있었다.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두 사람은 동시에 누군지 짐작이 갔다. 두 사람이 자길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았는지 손을 멈추고 하는 둥 마는 둥 일단 인사를 한다.
“수겸이 형!”
한 번만 불러도 알아. 먼저 간다며 한 손을 들어보이는 선배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아까 체육관에서 감독님이랑 얘기할 때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야 연습 끝날 시간에 왔으니까. 연습 끝나고도 남아있다는 건 잔류연습이라고 할 생각인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 기다리던 윤대협의 앞에 섰다.
“뭐야?”
“상대 좀 해주세요.”
무슨 만나기만 하면 하자냐, 얘는. 입속에서 중얼거린 말이, 윤대협에게도 들렸는지 하하하, 하고 머쓱하게 웃는다.
지 난 IH에서 엄청난 신인이라고 올라왔던 그가 상양과 해남에게 대패를 당한 뒤 느낀 바가 있었는지 어쨌는지 만날 때마다 이것저것 조언을 요청하거나 상대해달라고 하거나. 물론 재능있고 나름대로 노력도 하는 것 같고 태도도 싹싹해서 김수겸도 그런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오늘은 날이 아니었다.
“아…. 됐어. 나 교복입고 있고, 구두 신었고.”
“예비용 농구화 있는데.”
“크잖아. 됐어.”
“흐으으음.”
“뭐야, 불만이냐?”
“수겸이 형.”
“왜?”
길어지는 소모적인 대화에 김수겸이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윤대협은 이마를 긁적이더니 운을 떼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
….
“평소 땐 이 정도 도발하면 분위기 타주시던데.”
여전히 의아함, 혹은 이상함을 담은 표정으로한 듯이 말을 잇는 윤대협의 앞에서, 김수겸은 말을 잃고 서 있었다. 그러다가, 크, 하고 한숨인지 신음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 귀염성없는 루키와 1 on 1을 하고 싶어서 피가 끓고 소름이 돋는 걸 다 안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저 눈도 어이가 없고, 그 입에서 술술 튀어나오는 말도 어이가 없다.
그러셔, 그렇게 나오셨겠다.
머릿속에서는 몇가지 상황정보가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살짝 눈을 떠보자 벌써 김수겸의 대답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윤대협이 있었다. 그래, 선배도 이 녀석이랑 내가 얘기만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셨으면 나만 두고 가지는 않으셨겠지. 고민하던 모든 것들이 우스워졌다. 내가 아무리 고민해봤자, 넌 내가 네 도발에 안 넘어올 거라고는 요만큼도 의심을 안 한다 이거지.
좋아, 넘어가주마.
“윤대협, 네 농구화 가져와.”
“좀 클텐데.”
좀 전에 했던 말과는 정반대잖아, 임마. 김수겸은 윤대협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미소었다. 그리고,
“바보 아니냐? ”
하고,
“그 정도 핸디는 있어야 좀 게임이 될 거 아냐?”
핫. 윤대협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그 소리가 빠졌다. 김수겸의 겁없이 웃는 얼굴에 가슴이 크게 고동치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 웃음에 이끌린 듯이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렇게 나와주셔야지.”
2011.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