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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황) 애프터 어웨이크닝

leftoverpeach 2015. 4. 6. 00:00

※희미하게 배우 패러렐 

※무언가의 후일담같은 느낌이지만 안 읽으셨어도 괜찮...을... 것... 입니다..















 “그래서 사귀게 되었습니까.”

 「네!」

 “잘 됐네요. 그런데 굳이 저에게 말을 하는 건 왜인가요?”

 「쿠로콧치의 응원이 없었으면 제 짝사랑이 여기까지 지속되어서 이윽고 열매를 맺는 일도 없었달까!」

 “응원한 기억이 없는데요.”

 「쿠로콧치 또 그런다~.」

 “그만해주세요, 모처럼 마시는 마지바 바닐라 쉐이크인데, 입맛 떨어집니다.”


 쿠로코가 스트로우를 쪽 빨고 말하자, 키세는 양 손으로 턱을 괸 채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모자와 안경으로 얼굴을 거의 감추고 있어도 그 표정은 능히 알 수 있었다. 없는 것을 없다고 말했을 뿐인데 뭔가요, 그 츤데레를 보는 듯한 눈은. 쿠로코는 항의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키세군.”

 「네?」

 “아까부터 왜 필담을 하는 건가요.”


 쿠로코가 키세 손 안의 수첩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키세도 마치 쿠로코의 시선을 쫓듯이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사각사각 글자를 써내려간다. 수첩을 들어 올리는 표정이 어째 기쁨에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불길하다 싶었더니 쓰여 있는 내용이 이거다.


 「쿠로콧치 그렇게 제 목소리가 듣고 싶은가여?」

 “아니라는 걸 알면서 물어보는 키세군은 정녕 마조인가요?”

 「너무햇.」




애프터 어웨이크닝




 주말 낮의 마지바는 북적거렸으나,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키세가 말을 못하니 이리 조용하다는 걸 쿠로코는 사무칠 정도로 실감했다. 콜라를 쭉 들이킨 키세는 이윽고 다시 수첩을 들었다. 


 「그나저나 별로 안 놀라네여. 아카싯치랑 사귄다는 거.」

 “처음 들었을 때는 굉장히 놀랐는데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몇일 전에 아카시군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엑, 뭐지,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연하의 여배우와 결혼해 정원 딸린 벽돌집에 사는 아카시군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아카싯치는 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져!」

 “남 탓하지 마세요. 오히려 왜 키세군은 그런 얘기를 했나요. 손발이 갈려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그치만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비는 게 당연한 거잖슴까.」

 “……키세군의 그런 면은 정말 몹시 짜증이 나네요.”


 키세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뭔갈 수첩에 쓰기 시작했다. 보나마나 얼도당토 않는 얘기일 것이 뻔해서, 쿠로코는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키세군, 대체 목은 왜 그런건가요?”


 그러자 키세는 곧장 쓰던 페이지를 뒤로 넘기고 펜을 놀린다.


 「당분간 스케쥴 없으니까 괜찮슴다!」

 “저는 어쩌다 그렇게 됐냐고 물어본 거예요.”


 키세는 잠시 펜을 입에 대고 고민하더니, 테이블에 고개를 박고 열심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들어올린 수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 오늘 스케쥴 없음

 2. 아카싯치도 스케쥴 없음

 3. 아카싯치가 데이트 신청

 4. 그러나 저는 쿠로콧치랑 선약!><

 5. →빠른 거절

 6. 아카싯치 삐침                       」

 


 평범하게 말하듯이 설명하는 것보다 이편이 더 간결하다고 생각했는지, 6가지 항목으로 정리되어 있다. 대충 훑어본 쿠로코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네. ……대강 그럴 줄은 알았습니다만…….”


 사람이 목소리가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 목을 쉬게하는 ‘삐침’이란 뭐란 말인가. 대체 뭘 어떻게 얼마나 했길래 목소리도 못 내게 만들어놓았단 말인가. 그걸 귀엽게도 ‘삐쳤다’고 표현하는 키세도 대략 대인배가 아닌가. 뭐라 말을 이을지 고민하는 쿠로코의 심정을 알았는지, 키세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마세여! 정말로 말도 못할 정도는 아님다! 악화될 수 있으니까 오늘은 말하지 말라고 아카싯치가 못을 박아서.」

 “그랬습니까.”


 그렇겠죠. 쿠로코는 키세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카시군은 그거같네요. 연애라고는 한 번도 못한 채로 나이만 먹다가 일관계로 만난 연하의 남자가 조금 잘해주니까 섣불리 운명을 느껴서 어택에 어택을 거듭하다가 끝내는 기정사실을 만들어 억지로 사귀고 대놓고 집착하다가 결국엔 남자가 감당하지 못하고 헤어지자고하면 식칼 들고 자해 공갈하는…….”


 콩콩.


 쿠로코는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키세가 테이블을 살짝 쥔 주먹으로 두드렸기 때문이다. 인상을 찌푸리고 입술을 꼭 깨문채 들어올린 수첩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농담이 심함다 ‵3′」


 뭔가요, 그 이모티콘은. 얼굴을 마주보고 필담을 하는데 그걸 할 필요가 있는 건가요. 그리고 그에 맞춰서 표정을 짓다니 대체 뭘하고 싶은 건가요, 키세군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키세는 보이는 것보다 많이 화가 난 것이다. 쿠로코는 아카시와도 오랫동안 알고 지냈기 때문에 농담으로 넘겨주는 것이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키세군에 대한 아카시군의 절실함을 비유할 생각이었는데, 과연 말이 심했습니다.” 

 「쿠로콧치라도 아카싯치 나쁘게 말하면 화낼 검다! 아카싯치가 격한 구석은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라구여!」

 “………….”


 글쎄요, 그게 과연 그럴까요. 쿠로코는 눈을 내려깔았다.  


 ──료타가 생각할 만한 일이라면 뻔하지.


 아카시의 잠긴 목소리가 떠올랐다. 키세와 사귀게 된 사실을 털어놓던 날이었다. 


 ──어차피 젊은 날의 치기, 아무리 오래가도 사십대전반에는 끝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테지, 분명. 아니,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그렇군. 내 이해관계가 변할 즈음이라고 료타는 생각하고 있을거야.

 ──귀엽지. 내가 언젠간 저를 손에서 놓아줄 거라고 믿고 있다니 말이야. 행동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물론, 료타가 그걸 이해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만.


 그렇게 말하는 아카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과연 어디까지 농담으로 치부하고 넘겨야할지 쿠로코는 판단을 보류한 채로, 자랑인가요, 하고 담담하게만 말했다. 그러자 아카시는 무슨 얘기인지? 하고 반문했다. 그는 정말로, 눈치가 빠른 남자인 것이다.


 만약.


 만약 아카시정도로 마음이 강했다면, 키세를 계속 좋아할 수 있었을까.


 키세가 가끔씩 보이는 초연한 태도가 쿠로코는 몹시 불안했다. 그가 아카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키세가 아카시를 처음 만난 그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것보다도 허물없이 대하다가도 묘한 곳에서 선을 긋는, 그 버림받는 데 익숙한 사람의 태도를 쿠로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게 품었던 감정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여전히 그의 팬이기는 했지만, 도저히 그와 사귀는 자신을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과연 키세는 자기가 아카시에게 이 정도까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고 있는 걸까. 눈 앞의 키세는 혼자 좋아하던 시절이 너무 길었던 탓인지, 아카시가 지금 자길 좋아한다고 하는 것이 무언가 잘못된 행운인 것처럼, 금세 바로잡아질 일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그 날이 오면 키세는, 역시 그럴 줄 알았슴다, 라고 말해주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니까, 좀 더 매달리는 게 어떻습니까. 나와 선약이 있다고 나를 만나러 오면 어떡합니까. 질투로 눈이 멀어서 목이 쉴 때까지 당신을 안 놓아주는 그 사람을 우선해야죠. 이번에는 목이 쉬어서 다행이었을지 몰라도,


 “……다음엔 다리가 부러질 지도 모릅니다, 키세군.”

 「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해버렸는지 키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쿠로코는 살짝 입을 벌렸다. 아무래도 키세에게는 이참에 단단히 주의를 주는 게 좋지 않을까.


 “………….”


 그러나 결국 다시 다물었다. 이건 두 사람의 문제다. 아카시도 분명히 그리 경계해두지 않았던가. 나는 절대로 키세를 놓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쿠로코 자신이 끼어드는 건 오만이다. 그리고 조금은.


 “아뇨, 아닙니다.”

 「다리가 부러진다구여?」

 “혼잣말입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방금 키세군이라고 하지 않았슴까?」

 “저희 집 강아지 이름이 키세군입니다. 2개월된 골든 레트리버인데 귀엽습니다. 몸집은 2호를 따라잡았지만요.”

 「엣, 정말여? 보고싶슴다!」


 ──아카시군, 너는 키세군을 상대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기분이, 분명히 존재했다. 


 쿠로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리도 없는 눈 앞의 키세는 강아지 사진을 보여달라고 성화였다. 그래봤자 평소에 비하면 훨씬 얌전하게 수첩을 마구 흔드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쿠로코의 눈이 문득 수첩에 머물렀다. 오늘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면 후폭풍이 무서우니까, 집에 가기 전에 저 수첩도 처분시키고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다, 결국 고개를 저었다. 분명 역효과가 될 것이다. 쿠로코는 한숨을 쉬었다. 


 “키세군.”

 「네? 아, 강아지? 아니, 전가여?」

 “아카시군이랑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상담하러 오세요.”

 

 그 정도는 해주어도 공평하겠죠, 아카시군. 쿠로코는 마음 속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