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황) 라이어 라이어
※격렬한 캐릭터붕괴가 있습니다,,.
적황데이 오메데또!
그 날의 아카시 세이쥬로는 평범했다. 평범했다고는 해도, 그건 아카시 세이쥬로로써의 기능에 이상이 없었다는 것이지, 정말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기는 했다. 그럼 이렇게 말하자. 어느 때와 같이 완벽했고, 어느 때와 같이 흠 잡을 데 없는 아카시 집안의 외동아들이자, 라쿠잔 고등학교 농구부 주장 아카시 세이쥬로 그 자체였다고. 그 날은 장마 전선이 올라오고 있던 6월 중순이었다. 인터하이의 숙박지 수배 등을 위해 아카시는 도쿄로 올라갔고, 무라사키바라도 도쿄에 볼일이 있었고, 마침 키세의 생일이기도 하여 중학 동창끼리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다. 1학년 때의 윈터컵 이후 왜인지 이런 모임이 잦아진 기분이 들었지만, 아카시로써는 달가운 일이었다.
아카시는 내심 이 날을 고대했고, 선물도 신경 써서 골랐다.
무엇을 감추랴.
아카시는 키세에게 반해있었다.
반했다는 걸 깨달은 것은, 키세에게 물렀던 자신의 태도를 나중에 되어서 반추해보았을 때였지만.
사람인가 아닌가를 떠나서 뭐든지 단정하고 예쁜 것을 좋아한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냥 보기 좋다는 걸 넘어서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가슴이 설레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키세에게 마음을 전할 생각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중학교 동창, 현재의 라이벌로써만 여겨지길 바랄 뿐이었다. 자신의 환경과 그의 환경을 생각하자면, 도저히 솔직해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자, 이미 도착한 이들이 아카시를 반겼다. 적당히 야아, 오랜만이야, 같은 말을 주워섬겼다. 그리고 키세의 환한 미소에 몰래 한숨을 흘리고 가능한 미도리마와 무라사키바라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키세와 거리를 취했다. 가까이에 있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다. 오늘도 정말 잘생겼다고 생각하며 일단 식사를 하러 가기로 했다. 그 때 키세가 물었다.
“아카싯치는 어떻게 생각해여?”
“키세와 섹스하고 싶어.”
“히익.”
“…………?”
방금 이상한 말이 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보다 그 말이 아카시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 같다. 뭐지? 분명 ‘가까운 곳의 가게를 알아봐두었다’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저, 에, 응? 아카싯치 뭐라구요?”
키세는 설마 잘못 들었겠지, 아카싯치도 교양과 상식이 있는 사람인데,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어왔다. 아직 다른 이들은 서로 대화하느라 키세와 아카시의 대화에는 주목하지 않고 있었다. 당사자인 아카시도 키세도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아카시는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 찬 채, 최대한 침착하게 ‘가까운 곳에 있는 괜찮은 패밀리 레스토랑을 봐두었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말해줄까, 키세와 섹…….”
“와아아아, 그만, 그만, 그만!”
“?”
키세의 반응에 아카시는 그제야 제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지 깨닫고 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이상하다. 분명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하면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입밖으로 나오는 건 전혀 다른 얘기다. 키세의 비명에 각각 대화하던 이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고, 키세는 곁에 있던 아오미네의 등 뒤로 숨어 아카시를 경계했다.
“뭐냐? 왜 이래?”
아오미네의 물음에 키세는 파들파들 떨며 답했다.
“아, 아카싯치가 날 범함다!”
“키세군은 또 그런 미묘한 헛소리를…….”
쿠로코가 은은한 눈빛으로 키세를 불쌍하게 보자 키세는 울컥해 외쳤다.
“진짜인걸! 아카싯치가 범하려고 하는 걸!”
시선이 아카시에게 집중되고, 아카시는 평정을 가장해 식은땀을 흘리며 키세를 회유하려 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말을 하자. 미안해, 농담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 라고.
“키세, 범하지 않을 테니까 어서 아오미네 뒤에서 나와, 범하기 전에.”
“범하는 거예요?! 안 하는 거예요?!”
“틈을 봐서 범한다.”
“히이이익.”
끝났다. 이번에야말로 끝냈다. 홈런을 쳤을 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자살골을 넣었을 때도 이런 기분은 든 적이 없다. 아카시는 자신의 사회적인 이런저런 것들이 끝났음을 직감하며 자신이 친 정신적인 홈런이 서산너머로 날아가는 것을 먼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이 때가 되자 과연 다른 이들도 이상을 감지하고 아카시를 의아하게 보았다.
“아카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아카칭 괜찮아? 제정신?”
미도리마와 무라사키바라는 아카시가 걱정스럽달까, 약간 인격을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농담이야. 조금 지나쳤군. 키세의 반응이 너무 재밌어서.”
“농담이었슴까?”
키세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 이보다 더 할 수 없을 만큼 진심이야, 물론.”
“어느 쪽임까!”
“아, 지금 건 내가 아니야.”
내 안의 다른 나다, 그렇게 변명하려하자 머릿속에서 웃기지말라는 항의가 들리지 않은 것도 아닌 거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분명 기분탓일 것이다.
하다못해 물리적으로 입을 틀어막아 봉쇄하려고 해도, 키세의 말에는 그럴 틈도 없이 술술 진심이 나와 버리고 만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키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동창들은 정색하여 그를 보고 있었다. 가장 곤혹한 것은 아카시 자신이었다. 절대로 전할 생각이 없었던 마음을 이런 식으로 선보이다니 최악이었다. 인생의 오점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오늘의 일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카시군 장난을 하는 건가요?”
“그런 거였다면 차라리 내 인성의 문제로 끝나겠지만 말이야.”
“키세칭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지나친 거 같구.”
“결코 의도적인 건 아니다만.”
“아까부터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야, 아카시.”
그런가.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저런 새까만 흑심만 드러나면 그야 당연한 일이지만.
“대체 뭔가요, 아카싯치. 갑자기 막 그렇게 엣, 그, 나에 대한 갑자기 성적인 그거가 그거 해서 그게 그런 건가요?!”
“키세군 너무 동요하네요. 그 마음을 저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오히려 저희야말로 동창의 성적 그거를 갑자기 그거 당해서 조금 그거를 감출 수 없습니다만.”
“쿠로코 너도 진정하란 것이야.”
아카시도 남들 못지 않게 동요하고 있기는 했으나, 다른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는 걸 보니 이상하게 도리어 마음이 진정되었다.
“……뭐어, 진정해. 나도 당황하고 있고, 이런 식으로 밝히게 된 것에 대해 키세에게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고, 너희들을 모두 말려들게 한 점도 면목 없어. 하지만 맹세코 키세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고, 꺼림칙한 생각을 해본 적도 없어. 키세에게 뭔가를 강요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야. 나도 스스로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거듭 이상한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게 생각해.”
“………….”
“………….”
“아니, 꺼림칙한 생각은 잔뜩 한 거잖아.”
“아오미네군 분위기 파악합시다.”
*
길거리에서 아웅다웅하기도 뭐하니, 일단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하기로 한 것은 좋았으나, 도착한 근처 패밀리 레스토랑의 좌석이 기본적으로 4인석인 것이 좋지 않았다. 무언의 약속처럼 키세와 아카시를 제외한 네 사람이 떨어져나가 저들끼리 착석했고, 아카시는 하는 수 없이 옆 테이블에 앉았다. 키세는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저기요! 엣?! 같이 앉으면 제일 위험한 거 제가 아님까!?”
“평소 아카시의 인격으로 미루어보아 네게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야.”
“공공장소에서 아카칭이 뭘 할 것 같지도 않고, 밥 먹을 뿐이고.”
“자리가 네 개밖에 없는데 어떡하냐.”
“세 명씩 앉으면 되잖슴까! 쿠로콧치, 살려줘!”
“지금의 아카시군과 그다지 동석하고 싶지는 않네요.”
으음, 하고 다른 세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키세는 절망적인 시선으로 보았다. 아카시는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좋아.”
“아, 아카싯치?”
“나도 키세가 불편한 건 원치 않으니까, 누군가 키세와 함께 앉아줘.”
“에, 그럼 아카칭은.”
무라사키바라의 말에 아카시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나는 혼자서도 괜찮으니까. 인간은 언제나 혼자인 거지, 지금껏 혼자 살아왔고 이제와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것쯤 나에게는…….”
이어지는 정신공격에 못 이겨 키세가 아카시의 맞은편에 앉았다.
“같이 먹겠슴다! 같이 먹을테니까 그만해요! 자, 뭐 먹을까요!”
“나는 키세를 먹고 싶다만.”
“아아악!”
“큭…….”
아카시와 키세가 동시에 지뢰를 밟은 듯이 몸부림치는 것을 옆테이블의 네 사람은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그보다, 키세가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
“아, 그거 나도 생각했지만 재밌으니까 말해주지 말구.”
“키세가 입을 다무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야.”
소곤거리는 사이 아카시의 시선이 날렵하게 꽂혔다.
“너희에게 본의치 않게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어째서지?”
“착각입니다.”
키세와 아카시는 미묘한 공기 속에 앉아있었다. 그건 사실 별로 친하지 않은 두 사람에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오늘따라 특이한 점이라면 아카시는 묘한 후련함마저 느끼며 체념한 듯 가슴을 펴고 다리를 꼰 채 키세를 직시하고 있지만, 키세쪽은 메뉴판만 40번째 정독중이라는 점이었다. 어쨌든 아카시도 키세도 또 다른 지옥을 열 생각은 없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윽고 주문을 마치고 시선을 피할 메뉴판마저 없어졌다. 아카시로써는 침묵 정도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키세로써는 더없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아카시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미안해, 키세의 생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마련한 자리였는데. 늦었지만 축하해. 그리고 이것도.”
이렇게 말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키세의 말에 대답할 때는 그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스스로도 신기해하며 선물을 내밀었다. 키세는 마치 폭탄을 받아드는 모습이긴 했지만, 아카시의 선물을 소중히 받아들었다.
“엣, 고맙슴다……. 집에 가서 뜯어볼게요.”
“응, 그렇게 해.”
지금 뜯어봐도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허무한 부분이 있었다. 지나치게 값이 나가는 선물을 준비하면 이상하게 의심받을까봐 가격과 품목을 신중하게 골랐건만, 막상 그걸 건네주기도 전에 스스로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될 줄이야. 키세는 아카시가 건넨 작은 쇼핑백을 제 가방 옆에 두더니,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어기 그래서……아카싯치, 무슨 일 있었나요? 오늘따라 이상하달까 내가 알던 아카싯치가 아니랄까……아, 인격적인 얘기 말고! 앗, 방금 거 지뢰였으면 미안함다!”
“………….”
무마할 수 있는 마지막 찬스를 키세가 보내주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변명을 해야한다.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며 입을 열었다.
“별 일은 없고 키세가 귀엽네.”
아카시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니까 그런 얘길 하는 게 이상하단 말이죠~……!”
“키세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게 된 건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만.”
“에, 엣? 좋아, 좋아하는거예요?”
“물론이야.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섹스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남자로 보였다면 의외네. 하지만 키세가 정신관계보다 육체관계쪽을 선호한다면 의향대로 해줄 수도 있어.”
“언제부터? 나를?”
“그 걸 말하자면 3년 전 겨울로 되돌아가 단 둘이 남아 연습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거리의 일루미네이션 속에서 키세가 문득 나에게 별님처럼 웃어준 때의 이야기를 할까.”
“에, 그런 적이 있던가……?”
“저기 옆테이블 분들, 주변을 생각해서 소곤거리는 건 좋습니다만,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도 충분히 수상해보이니까 주의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목소리를 낮춘다는 게, 어느 새 서로 코앞까지 다가가 있었다. 쿠로코의 제지에 정신이 든 두 사람은 서로 자세를 바로했다.
“아,”
키세가 문득 소리를 높이더니, 오늘 처음보는 미소로 말했다.
“아카싯치 얼굴 빨개졌슴다.”
무의식적으로 얼굴에 손을 대어보니 조금 열기가 느껴졌다. 아까 섹스 운운할 때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웃기는 일이었다. 마침 음식이 나왔다.
“자, 먹읍시다! 잘 먹겠습니다!”
음? 아카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게 키세의 얼굴이 아까보다 밝아보였고 기분 탓인가 희미한 미소마저 띈 것 같았다. 아카시는 정말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어쨌거나 키세도 동창들도 저를 경원시하지는 않으리라는 근거없는 희망회로를 풀 가동시키며 잘 먹겠습니다, 하고 말했을 때였다.
“아, 다 먹으면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요.”
목소리를 낮춘 키세가 몰래 속삭였다.
“어쩌면 오늘의 아카싯치는 나 때문인지도 모르겠슴다.”
그렇게 말하면서 키세는 씨익 웃었다.
*
하룻 밤 전의 일이다.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키세 료타는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샤워룸에서 나온 참이었다. 침대에 앉아 내일 만날 중학 농구부 동료들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열두 시가 되자 여기저기에서 축하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리고 조금 느긋하게, 키세가 고대하던 그 사람에게서도 축하 메시지가 도착했다.
생일을 축하해.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부우, 하고 뺨이 부풀어 올랐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생일인데 이렇게 사무적인 메시지라니. 어쨌거나 영구저장할 거지만.
무엇을 숨기랴. 키세는 아카시 세이쥬로에게 반해있었다. 하루라도 좋으니까 솔직한 마음을 알고 싶었다. 부장이나, 아카시라는 집안의 후계자나, 이런 입장에서 벗어난 그냥 아카시 세이쥬로가 생각하는 것들이. 그는 어떤 사람을 좋아할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애초에 그 사람 너무 금욕적으로 보이는 거 같은데 성욕은 있는 걸까.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이 궁금하다니 너무나도 순정파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근원이며 종착점이 아닌가. 그러니까 궁금해 하는 것도 별로 웃긴 일은 아님다, 응응, 하고 키세는 스스로 변명했다. 슬슬 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짧은 메시지를 두 번 세 번 읽어보며, 그간 자기 마음을 떠보려고 하던 수많은 여자애들에게 좀 더 잘 해줄 걸 하는 후회가 손톱만큼 생겼다. 그리고 사랑은 괴롭슴다, 아카싯치의 마음이 알고 싶슴다! 창가에 얼핏 보이는 달에게 빌며 잠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