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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황) 아름다운 아침 샘플

leftoverpeach 2019. 4. 19. 17:03

※아카시와 키세와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 오리지널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거부감이 있으신 분은 열람은 피해주세요.

 

 




 

 

“지금 행복하세요?”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금요일 오후, 역 앞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6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음에도 늦여름의 해는 질 줄을 몰랐고, 로터리에는 석양 지기 전의 뜨거운 햇볕이 바로 내리쬐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위를 피해보려 건물의 그늘에 늘어선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분수대 근처에서 부채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한 무리의 학생들, 어린 자식과 손을 잡은 부모, 바쁘게 통화하며 지나가는 회사원, 판촉용 티슈나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르바이트생. 어디선가 와서는, 어디론가 간다. 그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왕래하고 있었다.

그 한 가운데 아카시 세이쥬로는 서 있었다. 급격히 피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계를 흘긋 보았다. 그의 앞에는 잡지 취재에서 나왔다며 녹음기를 들이대는 기자가 서 있었다. 거래처에 들렀다가 그대로 퇴근하던 중이었으나, 이런 식으로 시간을 뺏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잠시 협력 부탁드릴게요, 3분이면 됩니다, 하고 아카시를 붙잡은 이는 어딘가의 언론사에서 나온 기자였다. 3분이면 된다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이런 저런 질문으로 이미 3분은 넘은 지 오래였다. 평소라면 이런 앙케이트 따위에는 붙잡히는 일도 없었다. 그보다, 아카시를 붙잡으려고 드는 대인배가 없었다는 게 정확하지만.

“……질문이 뭐였죠?”

“지금 행복하시냐구요?”

“……그건.”

아카시는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었다. 어떤 관점에서인가요, 하고 되물으려던 때였다.

“에? 그럼 료타군은 행복하지 않아?”

료타군, 이라는 말에 아카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또 다른 스태프들이 앙케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는 키가 큰 청년이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이의 물음에 청년은 곤란한 듯이 웃었다.

“아니,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 웃는 얼굴에 아카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곧 두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후광 탓에 그늘이 져 금방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의 전체적인 윤곽이, 몸짓이 너무나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TV나 전광판에서 보기만 했던 날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가까이에서 봤던 시절도 있었다. 절대로――아마도 무슨 일이 있어도 잊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얼굴이었다. 잘못 볼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설마 그럴 리가, 그런 일이 있을 리가. 기자가 저기, 하고 아카시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뭔가 말을 건네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목이 턱 막혀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청년 앞의 스태프가 말했다.

“아하하, 아가씨가 귀엽네요. 동생이신가요?”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아, 제 딸이에요.”

“뭐라고?”

“엣?”

저도 모르게 외친말에 청년이 반응했다. 그가 이쪽을 보았다. 다갈색 눈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은 놀람에서 경악으로 천천히 번졌다.

“아, 아카싯치?”

그 목소리는, 그가 부정할 도리 없이 키세 료타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 * *

 

키세 료타는 대학에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농구를 그만두었다.

돌이켜보면 벌써 9년 전의 일이다. 키세가 스스로 선택해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무릎이 더 이상 4쿼터의 시합을 버티지 못했다. 1쿼터라도, 그것도 안 되면 5분이라도 뛰게 해달라고 키세는 사정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3년을 이미 그런 식으로 임시방편적인 치료를 계속하며 무리를 시켜온 무릎이었다. 키세도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농구를 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받아들이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키세는 모습을 감추었다. 대학에서는 물론, 중학 동창들과 고등학교 팀 메이트들과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아카시가 추적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종종 광고나 뉴스에서 키세의 얼굴은 볼 수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당분간은 농구와 관계된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으리라는 마음을 헤아려 깊이 개입하지는 않았다. 그 기간 동안 키세는 지금껏 농구에 투자했던 시간을 모두 모델로써의 활동에 돌린 듯,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었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파고들지 않고, 바깥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생활을 하고 있어서, 키세가 다른 곳에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서 다행이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키세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고 머지않아 다시 그들을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몇 년이 걸릴지라도 말이다.

4년 후, 키세는 돌연 모델을 은퇴했고, 모든 미디어로부터 모습을 감추었다. 그 후 아카시는 키세를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바로 지금까지.

 

* * *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하고 이야기를 꺼낸 건 아카시였다. 키세는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어물어물거리더니, 강하게 다시 한 번 말하자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얼마 전에 이사 와서, 이 주변은 잘 모르거든요.”

근처 공원으로 옮겨와서 키세는 말했다. 그 시선이 놀이터를 혼자 누비고 있는 딸에게 향해있는 것을 거북하게 보며 아카시는 물었다.

“……조카야?”

“……응?”

“그럼 친척의 아이?”

“나한테 딸이 있다는 게 그렇게 쇼크임까?”

아카시의 희망적 관측을 곱게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고, 키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했다는 이야기는……들은 적이 없는데.”

그 때 아빠아, 하고 크게 부르는 소리에 키세가 시선을 들었다.

키세 쿄코입니다, 하고 혀 짧은 소리로 아까 아카시에게 인사했던 그 어린 아이가 모래밭에서 키세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곁의 키세도 배시시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건 아카시가 알고 있는 키세였으며, 동시에 모르는 키세였다. 시합의 타임아웃이나 연습의 쉬는 시간에 키세가 갤러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은 종종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언제나 키세의 팬들이었지, 딸이 아니었다. 팬에게 보내던 그 때의 미소와 지금 쿄코에게 보내는 미소는 전혀 다른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아카시에게는 그랬다.

키세 쿄코는 조그만 여자아이였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를 반묶음으로 정리하고, 이마까지 내려온 앞머리 아래에는 동그랗고 순진한 다갈색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키세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그런 아이가 키세를 아빠라고 부르고 있었다. 키세는 몇 년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후로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만 같은데.

격렬한 위화감에 아카시는 속이 안 좋아질 지경이었다.

쿄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키세는 입을 열었다.

“얘기하자면 긴데요. 음……짧게 말하자면,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검다.”

“……그렇군. 길게 말해 주겠어?”

“아니, 그게 전분데요.”

곤혹한 듯이 웃는 얼굴도 그대로다.

키세는 스무 살에 결혼을 했고, 2년 후에 아이가 태어났으며, 지금 5살이라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했다.

키세가 스무 살에 결혼했다는 것부터 모든 것이 아카시에게는 금시초문이었다. 아니, 아카시뿐만 아니라 어떤 미디어에서도 보도한 적이 없는 얘기다. 심지어 스무 살이면 모델 은퇴 2년 전이다. 키세가 연락은 끊었지만, 아직 모델 활동은 왕성하게 하고 있던 때가 아닌가.

“………….”

아카시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는 키세의 모델 활동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가 없다. 어떤 사람과 친한지,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아카시와 키세는 그렇게 대화를 많이 나눈 편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는 건 그 때문이리라. 이럴 때 쿠로코였다면 한 발 더 들어간 이야기까지 캐물을 용기가 있겠지만, 아카시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키세가 가장 힘들었을 때, 아카시가 아닌 누군가가 키세를 위로해주었고, 그 위로는 키세의 마음을 움직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상대와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 점에 충격받고 있는 자신을 파악하고, 아카시는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 은퇴를 한 건 아이를 위해서?”

“뭐어……가장 큰 이유는 그거네요.”

“부인은? 나도 알 만한 사람?”

“에……어떠려나.”

“현역 모델?”

“아……그게…….”

키세는 잠깐 입을 다물고 뒷목을 긁적였다.

“죽었어요. 5년 전에.”

 

* * *

 

로터리에서 키세 부녀를 만난 지 2주가 흘렀다. 그 뒤로 아카시는 몇 번 키세에게 문자를 보내보았지만, 학생 때는 사무연락에도 금방 꼬박꼬박 답신을 보내던 키세가 이제는 완전히 무응답이었다.

점심시간. 아카시는 적당히 식사를 마치고 창가에 서서 커피를 마시며 답신을 기대하지 않고 문자를 보냈다.

그 날 키세가 한 이야기는 이랬다. 아마도 아카시가 더 묻지 않았으면 먼저 꺼내지 않았을 이야기였을 것이다. 키세가 스무 살에 결혼한 여성이 있었다. 어느 날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2년쯤 지나 그녀의 변호사에게 연락이 왔다. 그녀가 사망했다는 것이다. 병사였다. 딸이 있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아이의 나이나 사귀었던 시기를 따져보았을 때 그녀의 부정을 의심하지 않는 한 키세의 아이였다. 그리고 키세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한 2년 동안 이런 저런 일도 있었는데……. 무사히 데리고 와서 키우고 있슴다.”

그렇게 말하는 키세의 표정에는 감정이랄 게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일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한 사건들을 그 자리에서 아카시에게 털어놓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완전히 스쳐지나가다 만난 일개 동창생으로써 취급받는 것에 아카시는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그 정도의 관계밖에 안 되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둘 사이에는 좀 더, 복잡한 감정이 분명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모습을 감추고, 혼자서 이런 저런 일을 겪으면서 연락 한 번 없이 살고 있었단 말인가.

심지어 지금조차 피할 만한 요소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창밖을 보며, 아카시는 그 날의 키세를 떠올리고, 또 과거의 키세를 떠올렸다.

울리지 않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지만, 역시 연락은 없었다.

 

* * *

 

아카시 세이쥬로는, 그 연심을 키세 료타에게 향하고 있었던 적이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렸을 적부터 빼어난 외모와 신체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 덕에 아카시를 남자친구로 원하는 상대는 언제나 있었으나, 아카시는 그에 응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변변한 연애 비슷한 걸 해 본 적이 없었다. 키세가 사라지고 나서야 뭔가 이상한 걸 깨달았다. 이상할 정도로 큰 상실감이 아카시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마음을 건넬 상대조차 없어진 후였다.

첫사랑이 성취되지 않는다는 건, 아마 그런 의미인 거라고 아카시는 생각했다.

지나가고 나서야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했다는 걸 깨닫는다는 의미일 거라고.

그 후로도 아카시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카시는 그 감정을 잘 정리해서 넣어두었다. 아마 두 번 다시 꺼내볼 일도 없을 것이며, 그대로 방치하면 오래 지나지 않아 혼자서 죽어 가리라고 생각했다.

몇 일전, 키세 료타가 다시 눈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중략)

 

꿈을 꾸었다.

교정에는 벚꽃이 망울지고,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불던 졸업식 날이었다. 잊지도 못할, 그 날의 기억이었다.

“아카싯치한테 할 얘기가 있어요. 체육관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키세는 아카시가 혼자가 된 틈을 노려 비밀스럽게 말했다.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는지, 저었는지, 확실치 않다.

어쨌거나 기적의 세대가 체육관에 모두 모였을 때, 아카시는 할 말을 끝냈다. 그 얘기를 들었다면 키세도 더 이상 할 말은 없을 터였다. 아카시는 체육관 뒤에서 키세를 기다리지 않았다. 키세가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키세가 할 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걸로 된 것이다.

그걸로 된 것이다.

 

* * *

 

눈을 뜨니 깊은 다갈색이 보였다. 맑고 커다란, 아이의 눈동자였다. 말없이 아카시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아카시가 지끈거리는 머리로 기억을 더듬는 동안,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아이는 벌떡 일어나 방밖으로 나갔다.

“료타군!”

그 한 마디에 아카시는 정신이 돌아왔다. 키세. 키세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 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해내려 애쓰지 않아도, 금방 알게 되리라 생각해 아카시는 굳이 기억을 더듬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자기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는 건가…….”

그 와중에도 아카시는 그 점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카시가 저만했을 때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둘러보았다. 간결하고, 장식적인 물건은 별로 없는 방이었다. 침대 사이즈로 보아 아마 키세가 자는 방이리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일어났슴까?”

이윽고 문을 열더니 키세가 나타났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나타난 키세는 좀전에 봤던 옷을 입고 있었다. 역시 그건 환상이 아니었다. 키세를 제대로 찾아내서 붙잡은 것이다. 아카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해. 여긴 키세의 집?”

“신경 쓸 거 없슴다. 그보다 아카싯치, 아까보다 훨씬 나아보이네요.”

“……나아보이다니?”

“그게, 아카싯치가 왠지 안색도 안 좋고 잘 서 있지도 못해서 일단 우리 집으로 데려왔는데, 병원 가는 편이 좋았으려나?”

단순히 더위 먹은 건가해서 일단 쉬게 했는데, 기억나요? 키세는 아카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키세의 손에 끌려 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온 기억이 희미하게 났다. 마치 꿈같이 어렴풋한 기억이었지만. 아카시는 한숨을 쉬었다.

“……가벼운 일사병이었을 거야. 미안해, 신세를 졌네.”

“아니아니, 난 딱히 아무것도 안 했슴다.”

키세는 손사래를 쳤다.

“그보다 아카싯치가 일사병으로 쓰러지다니, 어떻게 된검까.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죠?”

“………….”

돌이켜 생각해보면 최근 제대로 된 것을 먹은 적이 없다. 최근이라고 한정해서 말하기도 어렵다. 영양소는 섭취하고 있고, 보충제도 먹고 있으니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카시가 입에 담은 말은 이런 것이었다.

“……물론이야. 키세가 걱정할 것 없어.”

“………….”

아카시를 잠시 물끄러미 보던 키세는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저기……아카싯치 괜찮으면, 저녁 먹고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