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아무런 이유도 징조도 없이, 마키 신이치는 눈을 떴다.
커튼 뒤의 하늘은 아직도 푸른 채로 새로운 해를 맞이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마키는 어떤 날도 거른 적 없이 행했던 런닝이 오늘따라 내키지 않은 참이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일까. 올해부터 주장이라는 사실에, 실적을 내지못한 작년이 떠올라서, 올해는 그보다 좋은 결과를 내야한다는 것이 부담되어서, 그러나 이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없어서, 어깨가 무거워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집을 나서, 고개를 저어 사념을 털어내었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두어발 딛은 마키는 망설이다가, 다시 왼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후지마, 라고 써 있는 그 문패가 시야에 들어오자, 마키는 탈력한 듯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고, 이윽고 그 앞에 멈춰서 무릎을 짚었다. 2층 집 건물을 올려다보았지만, 불이 켜진 방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아마도 아직 자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나갔거나 둘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시간은 5시 30분. 어차피 못 만날 것도 반쯤은 알면서 온 거였다. 그렇게 타이밍 좋게 만날 수 있을 리가 없지.
딱히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을 뿐이다. 만나고 싶다면 그냥 전화를 하면 편할 일이니까. 그런데도, 오늘도 만날 수 없나보다 생각하고 나니, 마키는 자기가 한심할 정도로 실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텐션은 체력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였다. 조금 힘빠진 다리로 다시 반대방향으로 달리려고 하던 참에, 검은색 현관문 창살을 밀고 나타나는 한 인물을 확인하고, 마키는 눈을 의심했다.
마주치자마자 그 얼굴은 이렇게 말했다.
"엑, 싫다."
그러면서 솔직하게 얼굴을 찡그린 것은 올해 상양의 주장이 될 후지마 켄지, 작년 인터하이에서 당한 부상은 벌써 깨끗하게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리고 남은 건 관자놀이의 상처뿐인 것 같이 말끔한 상양의 에이스, 마키의 라이벌이었다.
"…사람 얼굴을 보자마자 싫다니?"
"이른 아침에 뜻밖에 마주치는 건 귀여운 여자애가 좋다고."
"여자애가 아니라 미안하다."
"덧붙여서 귀엽지도 않아."
"……."
마키는 자기가 대체 왜 여기까지 왔을까 진지하게 고심하려 했으나, 후지마는 생수병 뚜껑을 돌려열더니, 마키에게 내밀었다. 질문하는 시선을 던지는 마키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다시 제 갈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마시라는 건지 들고 들고 뛰기 귀찮으니 제 시중들으라는 건지. 어찌됐든 물이 마시고 싶던 참이다. 후지마를 천천히 따라잡으며 마키도 목을 축이려했다.
"그나저나 너 우리집은 어떻게 알았냐?"
그 순간 후지마는 곁에서 참지 못하고 푸흐으읍, 하고 물을 뿜는 소리를 들었다. 그 명백한 반응에 당황한 것은 마키 본인은 물론이고 후지마 역시 그러했다.
"왜, 왜 이래?"
"아니 나는 결코 여기 네가 산다는 걸 알아서 매일 와봤다가 드디어 오늘 딱 마주친 건 아니다."
"뭐야? 진짜? 매일?"
"아니 확실히 오늘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다지 매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빈도는…."
"가끔은 왔던 거냐."
"삼일에 한 번 정도는…."
"…쁘띠 스토커."
"아니, 런닝코스일 뿐이다."
"왜 런닝코스를 남의 집앞으로 하냐고?"
"그건 우연히…."
"방금 네 입으로 내가 여기 산다는 거 알면서 왔다고 했잖아!"
"아니,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후지마."
"뭔 헛소리야!"
"너희 집 앞이라는 걸 안 건 좀 더 나중 일이니까."
"………."
"알고도 바꾸지 않은 점은 인정하겠다만."
후지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너 진짜 성격 걸작이다."
내뱉듯이 그렇게 말했는데, 정작 마키의 반응이라고는,
"갑자기 칭찬하지마라."
라며 정색을 하고서, 정말로 부끄러워 하는 듯이 약간 시선을 돌리기까지 하니까, 후지마는 이 이상 비난할 의지마저 잃어 그저 잠자코 달리기 시작했다.
후지마는 주택가를 한 바퀴 돌아나가서, 해무가 낀 도로를 말 없이 내달렸다. 곁에 있는 마키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었지만, 두 사람이 서로 수다떨고 장난 치면서 사이 좋게 런닝할 만한 사이도 아니었기에 큰 신경은 쓰지 않았다. 다만 후지마는, 마키가 분명 평소에 하던 런닝 메뉴에서 이미 초과한 양을 달리고 있을 거라는 점에 다소 마음이 쓰였다.
"아 역시 찜찜해."
밑도 끝도 없이 중얼거린 말에 마키가 물고 늘어졌다.
"뭐가?"
"아냐, 신경 쓰지마라."
"신경 쓰이잖아."
"그냥. 새해에 일어나서 제일 처음 본 얼굴이 해남이라는 게 걸려서 그런다."
"나는 해남의 얼굴인가."
"풉."
"…웃으라고 한 소리가 아냐."
코너를 돌자, 드디어 눈쌓인 응달에서 벗어나 슬슬 햇볕이 비치는 바닷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양상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쉬는 후지마.
"아, 싫다."
"또 뭐가."
"해남이랑 첫 일출을 보는 게 싫다고! 올해는 분명히 좋지 않은 일이 있을거야."
"액땜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 아니냐."
"……."
후지마는 뭔가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더 이상 마키에게 뭐라고 하는 것도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그냥,
"너…. 좀 더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라."
하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마키는 머리 위에 퀘스천 마크가 보일 듯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설명해주는 것도 불쌍하고 해서 후지마는 그냥 손을 저었다.
"역시 너희 팀에 진이 있는 건 아까워."
"밑도 끝도 없군."
"진이 우리 팀이었으면 좋았을텐데. 개인적으로는 센도보다는 진 쪽을 평가해주고싶지 말이야. 센도 그 녀석은 너무 느슨해. 상양에서는 어림도 없을텐데."
"…이토가 그런 성격이 된 건 네 탓이었나."
"이토가 뭐 어때서?"
"아니, 잊어버려라."
"그러고 보니 카즈시도 비슷한 말 했던가."
"……하세가와 말인가?"
마키는 무얼 생각하는지 잠시 다물고,
"예전부터 궁금했다만 왜 하세가와는 그…, 이름으로 부르는 거냐?"
"응? 그야 카즈시랑 친하니까."
친하다면 그건, 그야 충분한 이유였다. 친한 사이끼리는 서로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지. 마키가 납득 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여전히 완벽한 대답을 듣지 못한 기분으로 어정쩡하게 생각에 잠겨있는 곁에서 후지마는.
"올해도 카즈시랑 같은 반 됐음 좋겠다. 액땜했으니까 좋은 일도 있어야지!"
"……방금 깨달았다만 날 만난 게 액땜이라는 건 좋은 의미가 아니었군?"
"아아, 그거 네 자업자득."
"작년엔 하세가와랑 같은 반이었나?"
"아니, 중학교 2학년 때가 마지막이었나?"
마키는 눈을 깜빡였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응."
"그 때부터 알고 지낸 건가?"
라고 물으려다가, 다시,
"아니, 그때가 마지막이라고? 그 전에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있다는 소리인가?"
아니 그럼 그 전부터 알고 지냈다는 소리인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는 마키를 보고 후지마는 킥 웃더니,
"응? 그야, 나랑 카즈시랑 초등학생 때부터 친구니까 그렇지!"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별자리나 혈액형이 사람의 성격을 좌우한다는 근거없는 이야기를 마키는 그다지 신용하지 않았고 흥미도 없었지만, 후지마를 보고 있으면 그것도 그저 틀린 말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야기를 늘어놓는 순서는 지극히 지리멸렬하지만 자기자신 안에서는 다 이어져있다는 점이. 마키는 나즈막히 한숨을 쉬다가, 후지마의 콧노래 소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갈색 머리카락 아래로 비죽 뻗은 이어폰 선에도.
"뭘 듣고 있는거야?"
"응."
입으로 대꾸해주는 것도 귀찮은지, 후지마는 응, 하면서 이어폰 한 쪽을 마키의 귀에 쑤셔넣었다. 정확히 말해 쑤셔넣은 것이었다. 얼마 안 되지만 둘은 신장 차이가 조금 있었고, 약간 떨어져서 달리고 있었으며, 행위의 주체는 후지마였기 때문에, 마키의 귀에 이어폰을 곱게 꽂아준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후지마의 무정한 태도에도 익숙해질만큼 익숙해진 마키는, 크게 마음에 담는 기색도 없이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요동치는 것 같은
두근대는 고동소리에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
언제쯤이면 변하는 걸까 이 답답한 친구관계.
"……."
"어때?"
"…뭐 좋은 노래군."
"그러냐? 이거 테이프 하나가타거야. 너 그 녀석이랑 취향이 맞는구나."
이상하게 코드가 맞네, 하고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하는 후지마에게 마키는 아무말도 대답하지 못했다.
"아 참, 하츠모우데 갔어?"
"갔다만."
"오미쿠지는?"
"소길."
곁에서 후지마가 킥,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금세 입을 가리고 있었지만.
"너는?"
"………."
물어보자 후지마는 노려보면서 입을 꾹 다문다. 보나마나 대흉이었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너 내가 대흉 뽑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
뜨끔해서 말문이 막힌 마키에게 후지마는 왠지 자랑스러운 얼굴로,
"미안하지만 소흉이거든?"
"그랬냐."
"응."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군."
"어?"
"너랑 나랑 합쳐서."
"왜 합치는데?"
마키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잠깐 하늘을 올려다봤다가, 바다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잠깐 내려갈까?"
후지마는 마키가 대답을 어물쩍 넘어간 걸 구태여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바닷가로 내려가는 간이 계단을 밟았다. 흰색 페인트 칠이 된 나무판자들은, 지금은 온통 칠이 까지고 이곳 저곳 깨진 채 해변의 모래 범벅이 되어 원래 길을 다니던 사람이 아니면 있다는 것도 잘 모르는 간이 계단이다. 원래는 조금 더 가면 제대로 된 시멘트 계단이 나오는 것을, 마키와 후지마는 가드 레일을 넘어 그 간이 계단을 밟았다. 아주 조금 있으면, 해가 다 떠버릴 것 같았으니까.
방파제을 밟고 선 두 장신이 있었다. 원체 푸른 파도는 주홍색으로 뜨는 태양빛이 물들어, 뭐라고도 표현할 수 없는 정말 묘한 빛이었다. 하늘도 저 멀리는 청회색이었다가, 태양에 가까워질 수록 보라색, 자주색, 주황색으로 그 색을 바꾸었다. 하늘과 바다가 마치 거울에 비춘 듯이 같았다. 그 광경을 19살 소년 둘은 감탄의 말도 없이 보면서, 속으로는 서로 전혀 다른 생각을 하면서.
밝아진 지도 꽤 되었는데 해가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구름이 많이 껴서 해가 보이지 않으려나, 하고 마키가 생각했을 즈음이었다. 후지마는 옆에 쪼그려 앉아서 먼 바다의 부표가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이 터오는 새벽녘의 불그스름하면서도 푸른기가 남은 공기가, 그를 물들이고 있었다. 올해부터 주장이 되는 자신과, 감독이 되는 후지마. 유난히 작아보이는 갈색 머리통을 마키는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다시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주었다.
"후지마."
"응?"
후지마가 돌아보자, 뜨는 해에 뺨을 붉힌 마키가 아주 살짝, 고등학생다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올해도 잘 부탁한다."
마키의 시선을 따라 다시 바다 건너를 보자, 새끼손톱만한 태양이, 수평선 아주 조금 위로, 저 멀리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선명한 붉은 색으로, 어떤 구름도 가릴 수 없는 색으로.
"그래. 나도."
물론이지, 나 역시 올해도 잘 부탁한다, 고 낯뜨거운 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성격이 후지마는 아니라서, 그냥 그렇게만 대답해두었다. 그래도 의미는 충분히 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마키는 서서, 후지마는 방파제에 앉아서 해가 한뼘 정도 떠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때, 후지마가 천천히 일어서 바지를 털었다.
"가야겠다. 슬슬."
그 말에야 시간이 꽤 지난 것을 떠올린 마키가 시계를 들여다보자, 벌써 집에서 나온 지 2시간 가량이 지나있었다. 평소 때라면 가벼운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을 즈음이다.
"그래. 나도 가야겠군."
"난 온 길로 돌아갈건데, 넌 집 어느 쪽이더라?"
"반대방향."
후지마가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너 대체 왜 이쪽으로 온거야?"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을까해서."
"이런 게 뭔데?"
"걱정마라. 이젠 이쪽으로 오지 않을테니까."
"그거야 네 맘이긴 한데."
이윽고 뭘 생각했는지, 후지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먼저 간다. 널 먼저 보내는 건 왠지 찜찜하니까."
"얽매이는 것도 많은 녀석이군."
"시끄러. 넌 햇님 떠오르는 거 보면서 소원이나 빌라고."
"그건 이미 빌었다."
진지한 얼굴로 시침떼고 말하자, 후지마는 굳었던 얼굴을 확 풀며 키득거리고 웃었다.
"아, 하여간 웃기는 녀석. 난 간다. 다음엔, 시합에서 보자."
"그래."
과연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는 마키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마지막에 후지마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모래사장을 달려가는 뒷 모습에서 눈을 떼며 마키는 생각했다.
"오늘 밤은 돌려보내지 않아!"
외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다시 뒤를 돌아보니 후지마가 등을 보이며 달려가면서 노래가사를 외치고 있었다.
"하여간 소란스러운 녀석."
마키는 쓴웃음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후지마와 반대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2012.02.07~2013.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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