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꿈이다. 하나가타는 금세 깨달았다. 후지마가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할 리가 없다. 아니, 하나가타 본인과 상양이 그를 거기까지 내몰았을거라고 마음 속에서는 벌써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후지마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참고, 버티고, 견디고있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후지마이기에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것이리라, 그러니까 지금 이것은 꿈이리라. 강한 그로 있어주길 바라면서도, 약한 소리를 해주길 바라는 모순된 바람의 표출이리라. 만약 그가 이렇게 말해오는 날에는 강한 버팀목이 되어주자, 그런 생각이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하지만 후지마의 말에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후지마는 후, 하고 소리가 날 정도로 입을 끌어당겨 미소짓더니, 그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나가타가 발을 딛은 육교 위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쿵.
"……!!!!"
꿈이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하나가타는 꿈이어서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렸다. 새벽의 낮은 온도가 식은땀을 흘린 몸을 습격해온다. 그럼에도 체온은 식지 않고 심장은 두근거림을 멈추지 않는다. 하나가타는 어깨로 숨을 내쉬었다.
꿈이어서 다행이다. 아아, 그래. 후지마가 그런 말을 할리가 없지. 후지마가….
(뭐라고 했더라?)
숨을 고르는 사이에 꿈의 파편은 기억을 정리하는 걸 기다리지 않고 파삭파삭 부서져, 그 연계성을 점점 잃어갔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눈을 깜빡이며 꿈을 떠올리려고 하는 사이, '후지마가 뭔가 말했다', 그리고 '무서웠다'는 극히 일반적인 내용만 남고 꿈은 기억의 손틈 새로 빠져나갔다.
겨울 선발이 끝나고 나서 3학년은 이미 완전히 은퇴했다. 원래대로라면 여름에 이미 은퇴 했어야하는 것을, 끈질기게 남은 3학년들을 거북해하지도 않은 2학년들은 그들이 졌을 때 같이 울고, 은퇴할 때는 자기 일같이 서운해하며 종종 들러달라고 했다. 새로운 주장 이토를 중심으로 상양은 서서히 발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새 감독은 오지 않았고, 이제 막 주장이 되어 버거워할 이토가 작년의 자기처럼 느껴지는지, 후지마는 종종 체육관을 들렀다.
오늘도 귀가길은 현역들과 함께였다.
그리고 하나가타도 진로에 대한 담임과의 상담때문에 늦어져, 우연히 하교길에 마주친 것이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간다는 이토와 후배들을 보내고, 후지마와 하나가타는 전철역을 향해 걸었다.
작년 이 때라면 다른 농구부 동료들과 함께 걸었을 길인데, 지금은 단 둘뿐이다. 흐린 카나가와의 하늘은 운치없이 눈도 뿌려주지 않고 인상만 찌푸리고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완전 춥다. 그치."
"겨울이니까."
"응, 그렇네."
"후지마,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너 매년 걸리잖아."
"늦었어. 벌써 걸렸어."
"저런."
"지금도 머리가 어질어질해…."
"얼른 돌아가는 편이 좋겠네."
間.
"진로상담했냐?"
"그래."
"어땠어?"
하나가타는 쓴웃음했다.
"동대가라고 하던데."
"우왁! 자랑하지마, 이 자식아."
"자랑이 아냐. 피곤해."
그리고 네가 먼저 물어봤잖아. 그렇게 말해도 후지마는 입술을 삐죽였다.
"참나."
부러워죽겠네, 키도 크고, 여자한테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하고, 그리고 농구도 잘하고…. 후지마가 투덜거리는 걸 가만히 듣고 있다가, 너만큼은 아니지, 하고 추임새를 던졌다. 뭣, 하고 반박하려는 것을, 키야 내가 더 크고 공부도 내가 더 잘하는 건 맞지만, 하고 말하자 빙긋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역시 자랑하는 거 잖아!"
란다.
"후지마."
"응-?"
"넌 어때."
"………."
"…왜 거기서 입을 다무냐."
"…어딘가 가겠지…."
후지마가 목도리속으로 콧등까지 파묻으며 웅얼거린다.
아 그러셔, 말할 생각이 전혀 없으시단 말이지. 하나가타는 19cm 아래의 갈색 머리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들었어."
"……."
"해남에서 추천이 왔다며."
"…누가 그래."
"너희 담임이."
목도리 속에서 그 자식, 하고 제 은사에게 욕을 뱉더니, 또 입을 다문다.
"어쩔 생각이야?"
"…어떻게 생각하고 뭐고, 벌써 거절했어."
"후지마!"
"벌써 끝난 얘기야."
더 이상 캐묻기가 뭐해서 하나가타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후지마는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 한참 걷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떻게 해남을 가냔말이야."
間.
다시 둘이서는 아무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육교를 오르기 시작했다. 발 밑에서는 자동차들이 바쁘게 지나다닌다. 평소에 농구부 동료들과 시끌벅적하게 지나다닐 때는 이 육교가 이렇게 긴 줄도 몰랐는데. 하나가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후지마가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팔을 걸쳤다. 아래에서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을 구경하듯이 약간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토가 말이야."
"응."
"더 이상 안 오셔도 된다고."
"호오. 이토가."
"이제부터는 자기 역량으로 어떻게든 해 나가야 할테니까, 나는 수험공부에 힘쓰라나."
"말 잘하는데."
"그러니까 말야. 많이 컸지? 이토가 말이야."
처음에 봤을 때는 요만했는데. 아, 그립다, 그리워. 그런데 이토가 이제 주장이라니. 선배들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래도 이젠 많이 주장다워진 것 같더라. 그야, 뭐, 오오라나 존재감으로 따지자면 진은커녕 센도도 한참 못 따라가지만. 그래도 나는 역시 이토파일까나.
먼 곳을 보면서, 조용조용 얘기하는 후지마의 모습에는 체육관에서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며 백여명이나 되는 농구부원들을 호령하던 호랑이 감독의 기백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조금, 개운해 보이고. 또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냐."
"응."
"나는 후지마파려나."
"뭐? 바보냐, 너."
그런 파는 없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후지마는 큭큭거리며 웃었다. 진심이었는데…. 격려하려고 한 말이지 웃으라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뭐어, 웃음을 되찾으셔서 다행입니다, 감독님. 그 말은 마음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후지마의 웃음소리는 차츰 줄어들었다.
"하나가타."
"응."
목도리에 반쯤 얼굴이 묻고 있어서 후지마의 표정이 이제는 잘 보이지가 않았다.
"3년 동안 재밌었지."
그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 예전에 이 장면을 본 적 있지 않나? 그것도 바로 얼마 전에….
갑자기 후지마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난간이 너무 낮아 보였다.
"그랬지."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던 고교생활이었어."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괜찮았다는 평가가 가능한거지만 말이야."
"시끄러."
"나 참."
담담하게 대꾸하는 말과 달리 마음 속은 초조와 불안으로 차기 시작했다.
"나 말야…."
뭐지, 이 기분은.
"조금 지쳤을지도 몰라."
후지마는 그렇게 말하더니, 살짝 미소짓는 것 같았다. 다음 순간 그의 무게중심이 앞쪽으로, 난간쪽으로 기우뚱했다. 전신의 피가 식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후지마, 성급히 굴지마!"
그와 동시에 하나가타는 후지마의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다른 왼팔로는 스스로의 머리를 짚고 있는 후지마는 몸을 반쯤 하나가타에게 기댄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 뭘 성급히 굴지 말라고?"
"너 방금!!"
"아니, 잠깐 어지러워서…."
갑자기 눈 앞이 핑 돌길래…, 하고 말하는 후지마는 여전히 사건의 경위가 전혀 파악이 안 되는 모습이었다. 하나가타는 어이가 없어서 허, 하는 소리밖에는 나오지 않고, 그렇다고 자기가 무슨 심정으로 후지마의 팔을 잡아당겼는지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다시 한 번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면서 팔을 놓아줄 때, 초점을 맞추려고 미간에 주름을 모은 후지마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뭐야 너 혹시…."
후지마는 차마 혹시, 의 뒷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 표정은 놀람에서 당혹으로, 그리고 다시 어이없음에서 웃음으로 번져갔다. 이어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목에서 큭, 큽, 하는 소리를 냈고, 이윽고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 너 내가 뛰어내릴 줄 알고…. 큽…. 푸흐흐흡."
"웃지마…."
난 진짜 진지했단 말이야…. 하나가타는 약간 민망한 한 편 열이 받아 말했다. 그러자 후지마는 가슴을 쭉 펴더니,
"걱정 마라, 바보야. 난 죽을 이유같은 거 요 만큼도 없거든."
너야말로 나중에 센터시험 망쳤다고 질질 짜지나 말아, 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하나가타는 숨이 빠지듯이 가볍게 웃었다. 아아. 다행이야. 후지마는 강해서. 후지마와 함께 농구를 한 3년은 잘못되지 않았어. 후지마 밑에서 농구를 한 1년은 잘못되지 않았어. 저렇게 강한 감독은 어디에도 없어, 그건 분명하니까.
여름, 울면서 경례를 하던 후지마를 잊지 못한다.
후지마에게 기회를 주지 못해서, 그의 여름을 14분만에 끝나게 해서. 겨울에도 전국에 가주지 못해서. 떠올려보면 눈물이 차오를만큼 아쉽고 분한 기억들 뿐이다. 그런데도.
'3년 동안 재미있었지.'
"…역시 후지마파려나."
"뭐라고?"
"아무 말도 안 했어."
"어라? 너 우냐?"
"가자."
"너 괜찮냐? 그건가? 임산부들한테 온다던 조울증 같은거야?"
말 같잖은 소리를 조잘거리며 하나가타를 뒤따라 육교를 내려가는 후지마는, 목도리 속으로 숨은 하나가타의 표정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가타 역시, 네 시간 뒤, 이야기를 들은 나가노와 타카노의 놀림문자를 받고서 섣불리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입을 놀린 것을 천번 만번 후회할 것을 아직 모르는 6시 49분의 한겨울이었다.
2011.05.10~201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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