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키세 생일기념
키세 생일 축하해 사랑해ㅠㅁㅠ)**
그러고 보니 이제껏 한 번도 밤에 벚꽃을 본 적이 없다고 키세는 말했다.
“아, 아니다. 아마 어렸을 때,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친척집에 묵었을 때였을 거예요. 나이 많은 형, 누나들이랑 같이 보러 갔던 적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걸어서 잠깐 갔으니까 근처 공원에 보러갔었다고 생각하는데, 왠지 사람이 엄청 많아서 길을 잃고 울었던 기억이 나네여. 그리고 어둡고, 가지가 이렇게 축 쳐져있어서 엄청 무서웠던 기억 밖에는……….”
그 밖에도 교정에 벚나무는 있고, 연습 등으로 늦게 하교한 적도 있을 테니 필연적으로 그쪽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즉 보러 간 적은 있으나 감상한 적은 없다는 의미이리라. 보려고 마음먹는다면 지금도 부실의 창문을 들여다보면 교문 밖의 벚꽃은 보인다. 애초에 그 벚꽃을 보고 나온 이야기였다. 벌써 벚꽃이 필 시기네요, 하고 꺼낸 키세의 이야기에서. 아마 아카시과 단 둘이 남은 것이 어색해서, 날씨 이야기 꺼내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한 이야기리라. 하지만 아카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럼 보러 오겠어?”
“네?”
보러 가겠어? 라고 물었어도 키세는 놀랐겠지. 하지만 아카시는 보러 오겠어? 라고 물었다. 집에 월간 농구 신간이 있는데 보러 오겠어?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즉 이런 뜻이다.
“별장에 괜찮은 게 있어. 오늘 묵을 생각이었는데 괜찮다면 키세를 초대할 게. 좋은 대접은 못 해주겠지만.”
“괜찮은 거? 에? 괜찮은 거 뭐요? 벚꽃? 에? 별장? 응?”
“벚꽃 얘기를 하고 있는 것 아니었어?”
“헤, 헤에……. 흐응……. 그렇구나.”
눈이 휘둥그레졌던 키세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아카시 정도 되면 괜찮은 벚꽃나무가 있는 별장 같은 건 뭐 일상적으로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럼 사양치 않고……내일 가도 될까요?”
내일은 토요일이라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되고 모처럼 농구부도 체육관 점검으로 하루 종일 쉬는 날이다.
“유감이지만 오늘 와줬으면 좋겠는데.”
“오늘? 지금부터?”
“그래. 안타깝게도 토요일은 오전부터 비가 내릴 예정이라니까 말이야. 밤에 벚꽃을 보고 싶다면 아마 오늘 밤이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한다만.”
정말로 이런 저택을 별장이라고 방치해두는 종류의 인간이 있구나. 키세가 별장에 도착해서 처음 떠올린 생각이었다. 교외라고는 해도 도쿄다. 그런 곳에 이렇게 커다란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이라니. 주변에 집 한 채 없는 것을 보아 이 근처도 모두 아카시의 소유지라고 생각해도 틀림없으리라. 모르긴 몰라도 이런 집을 가끔 와서 꽃구경하는 용도의 별장으로 쓰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인간세상의 대부분의 일은 뭐랄까, 물벼룩의 손톱 같은 문제로 보이지 않을까, 키세는 생각했다. 실제로 물벼룩에게 손톱이 있는지는 몰라도.
“들어와.”
대문에서 이미 얼어있는 키세에게, 아카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키세는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들어가자 만개한 벚꽃길이 뻗어있었다. 정원에는 마치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는 듯이 연못도 있다. 별장의 건물자체는 오래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대문 옆에 기정장(祈征荘)이라고 쓴 패만 새로 바꾸어 달은 것 같았다. 별장의 이름일까. 역시 부자들은 하는 짓이 다르다고 키세는 생각했다. 문패를 새로 했다고는 해도 그쪽도 10년 이상 되어보였지만, 별장은 50년은 족히 이곳에 있었던 것 같으니 그에 비하자면 새것이었다.
“그나저나 집안에 이렇게 길을 낸다는 거 대단하네요. 정원사같은 사람도 있슴까?”
“아주 예전에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없어.”
“우와, 진짜로 있었구나.”
반쯤 농담이었지만, 이 정원을 처음 만들어 유지할 때는 분명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이건 지금이건 정원사가 필요한 집이란 걸 키세는 처음 보았다. 처음 본 걸로 치자면 이렇게 훌륭한 벚꽃길 역시 처음이었다. 개인의 사유지가 아니었다면 관광명소나 데이트 스팟으로도 손색없으리라. 벚꽃길은 대문에서 현관문까지 이어졌다.
“엄청 예쁘네요.”
키세는 감동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해질녘에 가깝기 때문인지 사진은 어둡게 찍혀 실물보다 훨씬 못했다.
실내는 마치 영화 세트장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화식인 정원과 달리 별장 자체는 양식 2층 건물이었다. 들어가자 제일 먼저 벽난로가 딸린 넓은 거실이 보였다. 두툼한 러그 위에 테이블과 소파 세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딘가에 사슴머리라도 달려있을 것 같은 중후함이 있었다. 한 50년 전을 배경으로 하는 미스테리 영화의 배경으로는 안성맞춤일 것 같은 공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이었다.
소중히 가꾸고 아껴온 별장이었지만,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새로운 것이라는 게 사라지고 발길이 영영 끊겨버려 현재와 단절된 공간 같다.
“일단 손님방으로 안내할게.”
아카시는 먼저 2층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고양이처럼 작은 소리 하나 내지 않는 아카시를 보며 키세가 계단을 밟기 무섭게 삐걱하는 소리가 났다. 문득 부러지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그런 일은 없었다.
층계참의 벽면에는 과거에는 액자가 걸려있었던 듯, 벽지 한 군데만 빛이 덜 바란 흔적이 남아 있었다.
2층은 한쪽 벽면으로만 방이 나 있고, 다른 한쪽은 난간이었다. 난간쪽에서 1층이 바로 보였다. 이것도 집 크기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리라.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집…….”
감탄하며 아카시의 뒤를 따르던 키세는 살짝 문이 열린 방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키세가 그 방에 다가간 것은 무례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거나, 호기심 때문은 아니었다. 단순히 문을 닫으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급히 뻗어온 손이 키세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 쪽이 아니야.”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아카시가 말했다.
“아, 응. 미안.”
“……편하게 있어도 좋지만, 너무 이곳저곳 들여다보진 말아줘. 본래는 손님을 맞을만한 곳은 아니거든. 보이는 곳만 급하게 정리한 정도니까, 내게 수치를 주고 싶은 게 아니라면.”
쓰지 않는 별장이 조금 더럽다한들 그게 그렇게까지 감추고 싶어 할 문제일까. 잘은 모르지만 아마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키세는 짐작했다.
“이쪽이야.”
아카시가 연 문은 그 방으로부터 두 개 건너의 방이었다. 키세에게 들어가라는 듯이 몸을 키세쪽으로 돌리고 있다. 그리고 키세가 고개를 들이밀자, 그 또한 드라마에서 보던 양식저택의 방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씩 관리해주시는 분이 오시지만, 이불이나 시트는 조금 먼지 냄새가 날지도 모르겠네.”
“아니, 그건 괜찮지만……그보다 잘 수 있으려나…….”
“자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다만.”
그렇게 말하는 아카시는 분명 키세의 감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리라. 이런 영화 세트장 같은데서 잠들 수 있겠느냐는 말이었지만.
아카시는 잠시 짐을 내려놓고 오겠다며 나갔다. 키세도 갈아입을 옷을 챙겨온 가방을 한 쪽에 주저하며 세워놓고 방을 구경했다. 침대도 쓸데없이 사이즈가 커서 키세 정도의 남자도 문제없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카시는 먼지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이불도 베갯잇도 시트도 보송보송하고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가구나 실용성 없는 벽선반과 장식품, 유행이 지난 무늬의 커튼이 바로 어제까지도 쓰였던 것처럼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는 기묘한 방이었다.
“우와, 이거 뭐라고 하더라, 라이팅 뷰로……?”
척 보기에도 기십만 엔은 우스울 것 같은 섬세한 조각이 들어간 라이팅 뷰로가 있었다. 사용하지도 않는 별장에 있는 가구조차 이런 물건이라니.
“이거 혹시 마호가니라든가 하는 거 아님까.”
중얼거리며 두드려보지만,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호가니 책상 실물을 본 적이 없으니 알아챌 재간도 없다. 호기심으로 열어보니, 여기도 생각보다 깨끗했다. 다만 서랍을 열어보니,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아마 이 라이팅 뷰로가 마지막으로 사용된 그대로 보존해둔 게 아닐까. 키세 역시 그다지 손대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진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래된 사진이었다. 작은 소녀와 조금 큰 소년이 함께 웃고 있었다. 소녀 쪽은 아카시와 조금 닮았다. 오는 길에 아카시에게 삼촌의 별장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럼 사진 속의 소녀는 아카시와 사촌지간일 지도 모른다.
“응? 아니……아닌가?”
그렇게 보자면 사진이 너무 오래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별 뜻 없이 사진을 뒤집어보니 뒷면에는 간단한 메모가 있었다. 기직장(祈織荘)에서 시오리와.
“기직장.”
이름을 되뇌었다. 아까 대문에는 기정장이라고 써있었다. 이름을 바꾸어서 새로 문패를 달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직장의 직을 시오리(詩織)에서 따왔다면 기정장의 정은…….
똑똑.
노크 소리에 키세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얼른 사진을 서랍 속으로 밀어 넣고 라이팅 뷰로를 닫았다.
“아카싯치?”
대답대신 문이 열리고 아카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식사부터 하겠어? 아니면 목욕물을 받아줄게.”
“에, 아니면 나부터? 잖아요?”
“?”
신혼부부가 할 것 같은 말을 진지하게 하는 모습이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아 키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 정말. 그럼 식사부터.”
“알겠어.”
방을 나가려다 말고 아카시는 다시 말했다.
“변변한 걸 먹을 수 있을 거라곤 기대하지 마.”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봐서 그렇게 말해놓고 사실은 엄청난 것이 나오는 게 아닐까 키세는 아닌척하면서도 기대했다. 그리고 키세가 식당에 내려가자 보인 것은 의외로 편의점 도시락이었다. 어디까지 의표를 찔러올 셈인가, 이 사람, 하고 무심코 생각해버렸다.
“우와…….”
“무슨 의미의 감탄이야, 그건?”
“으응, 아니, 감탄이랄까, 그렇죠, 이게 정상이죠, 응.”
아까 키세의 집에 들렀다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른 건 이 때문이었나 보다. 키세는 혼자 납득했다.
“새우튀김 도시락뿐이었는데 괜찮겠어?”
“오케이임다.”
도시락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둘러보니 전자 렌지같은 형상의 가전은 없다. 그렇다는 건 아카시가 직접 가스렌지 앞에 서서 팬이나 냄비에 담아 데웠다는 것이리라.
“아카싯치, 잘 먹겠슴다.”
“내가 만든 건 아니다만.”
“아, 저도 가져온 게 있었는데.”
갈아입을 옷을 챙기려고 집에 들렀을 때 가져왔던 봉투를 식탁위에 올렸다.
“이건……아카싯치 화낼지도 모르지만, 우리 나쁜 누나들이 챙겨준 거.”
키세가 봉투 속에서 꺼낸 캔을 보고 아카시는 평상시의 두 배 속도로 눈을 깜빡였다.
“……혹시.”
“혹시가 아니라도 바로 그거임다.”
친구 집에 꽃을 보러간다고 했더니 대학생인 누나들이 자기 전에 조금씩 마시는 맥주를 두 캔 챙겨 넣은 것이다. 꽃구경에는 술이 빠질 수 없지 않겠냐며 말은 했지만, 본질은 순전히 성격 나쁜 장난에 불과하다. 아카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실 생각인가, 키세는.”
“거꾸로 물어보는데 아카싯치는 안 마실래요?”
아카시가 한숨을 쉬었다.
“좋게 봐주기 힘들다만, 그런 건.”
“우리 단 둘 밖에 없고 괜찮지 않슴까. 내일은 쉬는 날이기도 하고, 왜, 꽃구경 하면서 마시면 맛있을 거라구요.”
키세야 친누나들에게 한 두 모금씩 얻어 마시다보니 그다지 거부감이 없는 것일 뿐, 아카시의 반응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고개를 젓는 아카시에게 키세는 안 줄 거니까요, 하고 얄밉게 덧붙였다.
하늘이 어두워지자, 아카시는 바깥으로 나가 정원 쪽을 향해 있는 베란다 문을 열었다. 내부는 이렇게나 양식풍인데, 베란다 문을 열면 바깥에 짤막한 툇마루가 이어져 있었다. 이건 확실히 어느 명소에 가서 먼발치로 흘끗 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 게다가 아까 그 산책로의 벚꽃들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데, 이쪽 정원에는 요괴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벚나무가 하나 있던 것이다. 게다가 어떻게 밤 벚꽃이라는 게 그렇게 잘 보일까 생각했더니, 지면에 조명을 설치해서 밤에도 볼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개인 소유의 별장에 이런 시설까지 갖춰두다니 돈 많은 사람들의 정취란, 하고 키세가 기가 질렸을 때였다. 팟, 하고 조명이 들어오자 별들이 총총 박혀있던 하늘이 희끄무레해지면서 별들도 자취를 감췄다. 대신 어둠속에 홀로 허리를 피고 있던 벚나무가 스포트 라이트를 받았다.
“우와…….”
키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모델로써 보여줄만한 표정은 아니었지만, 아카시는 크게 신경쓰지도 않으리라.
“뭐랄까, 풍채가 당당하달까, 늠름한 게 좀 마음에 들지도 모르겠네요. 저 사실은 벚꽃은 꽃만 잔뜩 핀 것보다 파릇파릇하게 잎사귀가 돋아난 쪽을 더 좋아하지만, 이제부터는 이쪽이 좋아질지도.”
“예전에는 이 정도 고목이 몇 그루 있었다고 하는데, 몇 년 사이에 병들어서 전부 처리하고 지금은 저 산책로와 이 한 그루 뿐이야.”
“아니 그래도 엄청 많은 검다, 이것도. 아, 근데 요즘은 관리를 안 하는 검까? 이렇게 예쁜데 아깝네요.”
아카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다 못해 키세가 맥주캔을 따자, 오는 길에 흔들렸는지 치이익 소리와 함께 거품이 흘러넘쳤다. 손가락에 묻은 맥주를 털어내는 키세를 보며 아카시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산책로 쪽에도 조명이 있었을텐데, 그 쪽도 구경하고 싶어?”
“앗 그건……저……. 사양하겠슴다.”
키세가 식겁한 표정으로 사양했다. 아카시는 고개를 갸웃했다. 왠지 거절치고는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나름대로 장관이라고 호평이다만.”
“그건 기대되는데요, 으음, 이런 말 하면 아카싯치 웃을지도 모르지만…….”
“?”
키세의 뒷말을 기다리며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 키세가 쥐어짜듯 말을 꺼냈다.
“나, 보이는 체질이거든요.”
“보인다니.”
“그러니까 유령말임다, 유령.”
아카시가 살짝 턱을 당겼다.
“아, 아카싯치 지금 정색했죠! 지금 정색했어.”
“……이런 농담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잘 모르겠다만.”
“아 정말, 그러니까 농담이 아니고요.”
“예를 들면 제 3체육관에 나온다던 유령 같은 건가.”
“그건 쿠로콧치였다면서요!”
“그럼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서 혼자 연주하는 피아노는 어때?”
“아, 아카싯치 그런 거 알고 있구나?”
“학생회로 민원이 들어오거든. 무서우니까 진상을 조사해달라고.”
“그래도 그거 아마 장난임다, 실제로 치고 있는 사람 있었으니까.”
그 때였다. 아카시가 잠시 키세의 손에 들린 캔을 유심히 본다고 생각한 때였다. 잡고 있는 키세의 손 위로 손이 겹쳐지더니, 자신쪽으로 죽 당겼다. 갑작스런 사태에 키세가 당황한 사이 아카시가 캔에 입을 댔다.
“아앗, 아카싯치 안 마신다고 했잖슴까.”
“조금 궁금해져서 말이야. 키세가 너무 맛있게 마시니까.”
한 모금 마시고 만족했는지 아카시가 순순히 손을 놓았다. 밤공기에 놓아진 손은, 아까는 시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고작 잠깐 온기가 닿았던 때문인지 아주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다.
“우와……. 저는 뭐든지 맛있게 먹는다구요.”
그러자 아카시는 조금 웃었다.
“그렇네. 나에겐 조금 쓴 것 같아.”
돌이켜보면 키세가 아카시와 단 둘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키세가 유령을 본다는 건, 유령을 보면 유령이라고 아는 건가?”
“어라, 믿어주는 검까? 아니면 흥미본위?”
예상외의 질문에 키세가 놀라 아카시를 보니, 아무래도 놀리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키세가 유령이라고 생각한 게 뭘까 궁금하긴 하다만. 이건 즉, 흥미본위가 되는 걸까.”
“뭐……내가 거짓말을 했을 거 같진 않지만 유령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네여, 요컨대. 아카싯치답다면 답슴다.”
“예를 들어, 몸이 반투명하게 보인다는 식인가?”
키세가 투덜거리거나 말거나, 아카시의 흥미는 그 쪽인 모양이었다.
“으음, 그런 건 아니지만, 방금 전까지 있었는데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에 없어진다거나,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달까. 가끔은 아무리 봐도 죽은 사람의 꼴을 하고 있달까.”
“즉 겉보기에는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다는 게 아닌가.”
“아니 뭐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지만요? 그렇게까지 부정할 의미 있슴까?”
아카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키세는 죽은 사람 중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엣……할머니라면 만나고 싶을 지도……. 하지만 내가 정하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봐도 의미 없슴다?”
“그렇다면 너무 불공평하잖아. 정말로 만나고 싶은 사람은 만날 수 없다니.”
키세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가만히 아카시가 뭔가 설명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아카싯치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슴까?”
“……누구나 있지 않을까.”
물어본 건 뭐든지 대답해주지만 모든 걸 대답해주진 않는다. 그런 대답에 키세는 불현 듯 서글퍼졌다. 왠지 아카시 안의 고독을 손가락으로 문지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키세의 손끝에 묻어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건 뭐였슴까? 비가 온다고 해도 내년엔 볼 수 있잖아요.”
그 말에 아카시는 잠시 텀을 두더니 입을 열었다.
“뒤쪽의 산에 터널을 낸다는 모양이야. 정원에 있는 것들도 모두 처분하고, 별장도 허물겠지. 50년 동안 박혀있던 뿌리도 오랜만에 공기를 쐬게 될 테고.”
“헤에, 그럼 피어있는 건 정말 오늘밖에 못 보는구나.”
키세는 새삼 감회를 곱씹듯이 말했다.
“왠지……눈치 없이 따라와서 죄송하네여. 혼자 있는 편이 좋았던 거 아님까?”
“아니, 굳이 말하자면, 나보다는 키세에게 선보이는 게 훨씬 의미 있어.”
“무슨 뜻?”
아카시는 고개를 기울이고 키세를 보며 웃었다.
“나에겐 마지막이지만, 키세에겐 처음이니까.”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키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거 왠지……나 되게 손해 보는 기분.”
그렇게 말하자, 아카시의 시선이 오랫동안 키세의 옆얼굴에 머물렀다가, 이윽고 멀어졌다. 그 사이에도 작은 벚꽃잎은 바람에 날려 두 사람에게 불어왔다. 그러고보니 어렸을 적 보았던 벚꽃을 무섭다고 생각했던 건 분명 거기서 무언가 무서운 걸 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그 밤중에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던 것도 이상했다. 그러나 오늘 아카시의 초대를 받았을 때는 어쩐지 선뜻 그러겠노라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다. 왠지 그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방치되었을 벚꽃은 고독해 보였지만, 조금도 무섭지는 않았다. 빛을 받아 꽃잎을 흩날리고 있는 모습에 키세는 확실히 아름다움을 느꼈다. 내일 비가 내리면 진흙에 뒹굴 꽃잎들임을 알기에 지금 더욱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그 때 별똥별이 하나 떨어졌다. 아카싯치 봤어요? 하고 말하기도 전에 꼬리를 끌고 사라져버렸지만, 그도 똑같은 것을 봤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기정장. 세이쥬로의 성장을 기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리라. 지금 빌 몫의 소원만은 그를 위해 써도 좋을 것 같았다. 부디 그가 지상에 떨어진 유성처럼 차갑고 외롭게 식지 않기를. 고독하지 않기를.
그 날은 꿈을 꾸었다. 아카시의 꿈이었다. 어쩌면 베개에는 꿈이 깃들어있어서, 그 위에 머리를 얹는 사람은 베개에서 꿈을 읽는 것이 아닐까. 이 베개를 사용했던 누군가가 아주 소중하게 생각했던 무언가. 지금보다 조금 더 키가 작은 아카시가 있었다. 키세에 비하면 아주 꼬마였다. 아주 작았지만 아주 자유로웠다. 곰 인형 대신 고독을 끌어안고 자란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카시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키세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오전부터 비가 온다는 것을 정말이었다. 딱히 아카시의 말이나 일기예보를 의심을 했던 건 아니지만, 저렇게 예쁜 정원도 자연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보니 조금 마음이 아팠다. 어제까지 위용을 뽐내던 꽃잎들은 빗발을 이기지 못하고 흙탕물에 나뒹굴고 있었다.
침대를 정돈하고 슬리퍼에 발을 꿰고 방을 나왔다. 지금이라면 어제 아카시가 열지 못하게 했던 방을 열어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흥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확인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방문 앞을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 주방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앞치마를 맨 여성이었다. 붉은 머리를 한 쪽으로 내려묶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하며 들어가자,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마도 어제 식사를 마음에 둔 아카시가 수배한 요리사나 헬퍼나 뭐 그런 것이리라 키세는 아직 완전히 각성하지 않은 머리로 생각했다.
“제가 아침 만드려고 했는데……. 빠르시네요, 아직 새벽 여섯시임다?”
그녀는 대답 없이 몹시 자애로운 표정으로 키세의 등 너머를 보고 있었다.
왠지 등골이 서늘해져서, 뭐지, 하고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일찍 일어났구나.”
아카시가 있었다. 벌써 샤워를 마치고 나온 건지 몸단장은 깔끔했지만, 눈에는 아직 조금 잠기운이 어린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그런 꿈을 꿨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카싯치 좋은 아침임다. 아카싯치 부지런하네여, 어느 틈에…….”
하고 말하며 아까 그녀가 서 있던 곳에 시선을 돌리자, 거짓말처럼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우와, 왠지 이럴 줄 알았다, 라는 생각과 우와, 이래도 되는 거야, 하는 생각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어느 틈에 뭘? 키세?”
키세가 휘청해 간신히 카운터를 붙잡고 섰다.
“아……아카싯치 혹시 여기 관리하는 분이나……헬퍼……부르지 않았슴까?”
“아니. 그래서 미안하지만……키세?”
그러고 보니 그녀는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 본 사진, 아니, 좀 더 가까운 곳, 키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을. 맞아, 아카싯치를 닮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이유 없이 슬퍼졌다. 당황한 아카시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그러나 뭐라고도 대답할 말이 없어서, 키세는 입을 벙긋 거리다가, 결국은 눈가를 비볐다.
'krb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황) 회중화원 샘플 (0) | 2017.01.06 |
---|---|
(적황) 눈동자 속의 시리우스 샘플 (0) | 2016.01.28 |
(적황) 13 (0) | 2015.09.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