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중화원
*경솔하게 특수관계였던 두 사람이 쿠로코에게 들키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야기
세상일이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노리코, 그래서 농구부 매니저 지원했대.”
“정마알?”
“그거 평범하게 키세군 노렸던 거 아냐? 3일이나 갈까몰라.”
“그런 거야?”
“농구부에는 멋있는 사람 잔뜩 있잖아?”
“아, 알아, 알아.”
“누구? 키세군 말고 누가 있어?”
“예를 들면……아카시군이라든가?”
“아카시군 멋있지~.”
“그치! 키세군은 멋있지만, 무게가 없달까~.”
“아카시군은 왕자님 같아서 멋있지!”
“키세군은……얼굴은 좋지만……그치?”
“응응. 뭐랄까……. 그치?”
“그렇지만 아카시군은 허들 높아 보이지 않아?”
“세상에, 뭘 모르네. 그게 좋은 거잖아.”
“절벽의 꽃이라는 느낌~?”
“아하하, 뭐야 그게, 완전 웃겨!”
“그런 면에서 키세군은 뭐랄까, 길가의 꽃 같은 느낌~.”
그런 대화를 들었던 것이, 어쩌면 도화선 역할을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런 일이 있었어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이제는 이미 늦은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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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콧치! 여기예요!”
높게 손을 들어 흔드는 키세를 포착하자마자 쿠로코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지바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손을 흔들고 있는 장신의 미남에게 집중되었다가 이어서 그 외침을 따라 쿠로코에게 집중되었으니 그도 당연했다. 잠시 다른 곳으로 갈까 망설이는 듯 시선이 허공을 헤엄쳤지만, 결국 키세 앞에 와 앉았다.
“키세군은 앉아만 있어도 눈에 띄니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하하, 미안. 쿠로콧치 보니까 기뻐서.”
쿠로코는 불편한 듯 앉아 서류봉투를 넘겨주었다. 카이조와 세이린의 연습시합에 관련된 서류였다.
“죄송합니다, 키세군이 오게 해서.”
“응, 전철로 오면 금방인데요, 뭐. 겸사겸사 쿠로콧치도 보고요.”
“……그 시간은 좀 더 유효하게 활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쿠로코는 한숨을 쉬었다.
다가오는 봄에 그들은 3학년이 된다. 기존 3학년은 윈터컵 이후에 이미 은퇴를 했고, 키세는 자연스레 카이조의 주장이 되었다. 다행히도 한 학년 아래에 다부진 후배가 있어서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다는 모양이지만, 쿠로코는 과연 키세가 본인의 농구 외에 농구부도 제대로 챙기고 있는 것인지 걱정이었다. 일단은 라이벌이기도 하니까.
“선배들이 이런 귀찮은 거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안 올라감다. 좀 더 잘 해줄 걸.”
“정말이지 이제 와서 하는 소리네요.”
“이제니까 알 수 있는 검다! 그러고 보니 아카싯치는 이런 거 작년,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까 재작년부터 하고 있던 거네요. 아, 테이코에서도 주장이었지, 참. 그럼 재재재작년. 역시 대단하네요.”
“재재재작년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아카시군은 어떤 의미로는 초인이니까요.”
“정말 초인임다. 그 정도로 뭐든지 하는 사람은 처음 봤슴다.”
다시 한 번 감탄하는 키세를 물끄러미 보던 쿠로코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떠올랐습니다만, 키세군.”
“네?”
“아카시군과는 무슨 사이인 건가요?”
“푸흐으으읍.”
키세군, 더럽습니다, 하고 쿠로코가 눈살을 찌푸리며 파편이 묻지도 않은 옷을 털거나 말거나, 키세는 마시던 음료수가 질질 흐르는 입가를 대충 닦으면서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쿠로코를 보았다.
“어……어떻게?”
“어떻게냐니요.”
쿠로코는 무표정한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렸다.
“바보인가요? 둘이 사귀냐고 물어보면 네, 그렇습니다, 이러려고 했습니까?”
“아니……그게…….”
입만 벙긋거릴 뿐 제대로 대꾸하지 못하는 키세는 여전히 사태를 따라갈 수 없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쿠로콧치가 이유도 없이 그런 걸 물어볼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죠! 어라? 잠깐만요, 근데 정말 왜 들킨검까?”
쿠로코는 도리어 어이가 없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키세군, 그 집히는 바가 없다는 사람 같은 물음은 대체?”
“없으니까 물어보는 거잖슴까!”
키세에게는 전혀 생각나는 그럴 듯한 장면이 없었다. 예를 들어 같은 공간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었던 중학생 때라면 모를까, 지금은 쿠로코와 겹치는 행동반경은 거의 없다. 키세가 일부러 찾아오지 않는 한.
어떻게, 언제, 대체 왜, 라는 물음들이 키세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키세군의 생일에, 네 맨션에 다 함께 파티를 한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구체적인 이야기를 꺼내자 쿠로코는 그 순간을 떠올린 것처럼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왜 그런 걸 하자고 한 건가요.”
“생일파티요?”
키세의 생일이 6월 중순에 있으니 그렇다면 벌써 일 년이 가까이 되는 이야기다.
저녁에 모여 냄비파티를 하고 케이크를 먹고 막차 시간이 가까워지자 다 같이 묵고 가자는 모모이를 필사적으로 말려 집을 나서는 이들에게 키세와 아카시가 손을 흔들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했을 때는 무엇 하나 문제될 게 없는데…….
“아, 혹시……!”
키세가 불현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가요. 드디어 뭐가 좀 생각이 났나보네요.”
“엑, 그렇지만……. 쿠로콧치 분명 돌아갔잖슴까, 모못치랑 다같이?”
점점 빨개지는 얼굴을 손등으로 가리며 키세가 추궁하자, 쿠로코는 북받치는 무언가를 꾹 눌러 참으며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
“돌아가는 도중에 지갑을 놓고 간 게 생각나서 잠시 되돌아갔었습니다.”
“비밀번호! 비밀번호는 어떻게 안 거예요!
“키세군의 집에서 몰래 생일파티 하고 있을 때 필요해서요. 모모이씨에게 들었습니다.”
“에, 그럼 나 비밀번호 공개된 집에서 계속 살고 있던 검까?”
“본인 생일이 무슨 대단한 비밀번호인가요.”
“으윽, 집에 돌아가면 비밀번호부터 바꿔야겠슴다.”
“부디 그렇게 하세요. 그것보다 그래서……뭐가 어떻게 되서 그렇게 된 건가요.”
“뭐가요?”
“그러니까 아카시군 말입니다.”
그거야, 하고 대답하려던 키세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단순한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답하려니 어느 게 제일 우선되는 건지 모르게 되었다.
“……그러게요. 정말 뭐가 어떻게 돼서 이렇게 된 건지.”
중얼거리자, 곁에서 쿠로코가 키세군이 모르면 누가 압니까, 하고 핀잔을 주었다.
“말하면 절대로 나더러 쓰레기라고 할 걸요.”
키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에 대한 쿠로코의 대답은 가벼웠다.
“아무리 그래도 쓰레기라고 하겠습니까.”
“한다니까요, 분명히.”
“말이나 해보세요.”
“그게…………어쩌다보니.”
그렇게 밖에는 지금은 설명할 수가 없었다. 쿠로코의 반응도 정해져 있었다.
“키세군은 쓰레기인가요?”
“그것 보라니까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자, 쿠로코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에게는 두 사람의 사정이 있는 것이겠죠. 제가 설명을 요구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네요, 아카시군과 키세군이 그런 사이…….”
먼 산을 보며 중얼거리더니, 잠시 뒤에 아, 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잠시 만요. 키세군, 그 후에 최근까지도 여자 친구 사귀었지 않았나요?”
“그랬는데요?”
태연한 대답에 쿠로코는 2배속으로 눈을 깜박였다.
“두 사람의 모럴은 대체? 아니 그보다 어떻게 된 건가요, 키세군의 방향성은?”
“방향성?”
“아카시군은 대체 뭔가요?”
아카시군은 뭔가요? 로 결국 쿠로코의 최초의 의문으로 돌아갔다.
키세는 눈을 깜빡였다. 한꺼번에 질문을 퍼붓는 통에 쿠로코가 정말로 궁금한 게 뭔지도 모르게 되었다.
“쿠로콧치, 하나씩 물어봐줬음 좋겠슴다. ……그보다 남의 성생활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 검까?!”
“저도 흥미본위로 묻는 것은 아닙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얘기해보세요.”
그렇게 얘기하는 쿠로코 역시 여간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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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인간의 원죄는 호기심에 있고, 그것에 농락당한 인간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키세는 그 말에 쌍수를 들고 찬성할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어쨌거나 그들의 관계는 호기심으로 시작된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남자 중학생이 흔히 가질 법한 성에 대한 호기심과는 조금 달랐다.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실에서 성인잡지가 발견되었다.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호기심 왕성한 이 시기의 소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것을 여자 매니저가 발견한 것이 좋지 않았다. 컬쳐 쇼크를 받은 그녀를 대신해서 모모이가 달려와 농구부실에 성인잡지를 가져오지 말라고 주의하였으나, 주범인 아오미네가 귀담아 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던 모모이는 아카시에게 상담하기에 이른 것이다. 뒤늦게 체육관을 정리하고 온 키세는 그 일에 대해서 성실하게도 고민하고 있는 아카시에게 상담을 받았다.
“아니……그 사람 절대로 말 안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애초에 지금도 학교에 그런 거 가져오면 안 되는데 뻔뻔스레 가져오는 사람이잖슴까.”
키세가 난처한 듯이 말했다. 그 사람이라는 건 물론 아오미네를 일컫는 것이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캡틴이 따끔하게 말하면 어느 정도는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패널티를 준다든가 어떻슴까? 연습량을 늘린다든가!”
“그래서는 학생이 학생에게 체벌을 가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키세. 옳지 않아.”
“그……거는 그렇지만……?”
복잡해지는 키세의 낯빛 위로 평소에 본인이 받아왔던 취급을 떠올리는 기색이 지나갔다.
“그럼 저는? 저한테는 체벌해도 괜찮슴까?”
아카시가 고개를 저었다.
“키세가 패널티를 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부원들보다 뒤쳐진 것을 보강하기 위해서이지, 괴롭히기 위해서나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다만?”
“에에, 정말임까?”
왠지 저한테만 엄하지 않슴까, 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보다 잡지에 대한 사안이 중요했다. 가져오지 말라고 주의를 해서 들었다면 애초에 이런 문제가 발생할 일부터 없었으리라. 키세의 제안대로 체벌을 주는 것도 탐탁치 않아한다면, 그저 잘 타이를 수밖에 없다. 그 타이르는 방법이 문제인 것인데, 애초에 아카시가 떠올리지 못하는 것을 키세라고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아오미넷치더러 잘 좀 간수하라고 옆구리나 찔러줘야지,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그보다 궁금한데, 캡틴도 야한 잡지 정도는 보잖슴까?”
“보기는 본다만.”
시원스레 내뱉는 아카시의 말에 도리어 키세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캡틴 야한 잡지 보는구나!”
“본다는 전제로 물어본 건 키세가 아닌가.”
“아니, 솔직히 흥미 있거든요, 캡틴은 어떤 야한 잡지를 보는 걸까.”
“어떤 거냐니……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서점에서 사는 검까? 직접? 역시 평소에 읽는 어려운 책들 사이에 끼워서 살짝 사는 건가여?”
아카시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
“에, 그럼 지금까지는 그냥 샀단 말이에요? 대단하다, 용자인가요, 아카싯치.”
“뭐가 말이야.”
이미 키세는 좀 전의 사안은 잊은 지 오래였다.
아카시 세이쥬로라고 하면 이 학교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 완벽철인의 대명사나 다름없다. 지금은 대체 이 남자가 어떤 표정으로 도색 잡지를 넘길 지가 더 흥미진진했다.
“취향이라던가 있슴까? 자, 잡지 고를 때의 기준은?”
이 질문에 아카시는 빠르게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방금 자신이 무슨 질문을 당했는지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평범한 질문이잖슴까, 다들 이런 얘기 한다구요?”
“그런가, 내겐 익숙하지 않은 질문이다만.”
“아오미넷치는 뭐 잘 아는 대로 거유파고 무라사키바랏치는 연상파고, 미도리맛치는 글쎄…….”
“그렇게 말하는 키세는 어때?”
예상치 못한 반문에 키세는 말문이 막혔다.
“네?”
“키세는 어떠냐고 물었어.”
“나? 나는…… 평범하달까…….”
우물쭈물 대답을 흐릴 뿐이었다. 어떤 취향이냐고 물어봐도 딱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그 종류의 서적은 농구부나 학급의 남자들끼리 돌려보는 것을 볼 뿐 직접 사서 볼 정도로 적극적이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에 사진을 보면서 대리만족해야할 정도로 여자에 곤란하지도 않았다.
“에……음……저기, 사시하라 코노미같은 느낌? 일까?”
요즘 제일 인기 있다는 아이돌이름이라도 대두면 되겠지. 그리 생각한 키세가 적당히 주워섬긴 이름에 아카시는 흐음, 하고 미덥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캡틴 누군지 암까? 아이돌인데……아, 그보다 나 말했으니까 캡틴도 말할 차례네.”
“……그렇군. 그래서 키세가 궁금한 건?”
“그러니까 캡틴 취향의 모델이라든가, 그라비아 아이돌이나, 있잖슴까.”
“딱히 고정된 인물은 없다만.”
“그래도 이런 요소가 좋다는 것 정도는 있잖아요?”
아카시는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하고 입을 열었다.
“우선은 금발일까.”
“와, 서양 취향임까! 캡틴은 완전 국산미인 취향이라고 생각했슴다.”
“글쎄, 얼굴은 그쪽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군.”
“그럼 귀여운 타입은 별로구나?”
달려들 기세로 묻는 키세와 눈을 마주치더니 천천히 대답한다.
“길고 날렵한 눈매의 미인인 건 확실한데.”
“그, 그렇구나. 신장이나, 헤어스타일은?”
“장신. 머리는 쇼트로. 피어스로 악센트를 주는 것도 좋겠지.”
그리고 그 묘사가 너무나 기시감이 있던 나머지, 눈을 깜빡이며 듣고 있던 키세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말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뱉고 말았다.
“그거 완전 나잖아…….”
“…….”
아카시의 움직임이 한 순간 멈추더니, 이윽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미, 미안, 캡틴 그런 생각 없었을 텐데 나도 모르게…….”
“아니, 신경 쓰지 마.”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거리더니 덧붙인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키세가 여성이라면 그런 느낌일까.”
태연작약하게 말하는 그 얼굴을 보고 키세는 놀림 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웃는 게 몹시 재미가 없었다.
이런 농담을 하는 사람이었어?
그런 생각을 하자 이유 없이 배신당한 것 같은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잠시 이상한 생각을 한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캡틴……….”
키세는 공격적으로 아카시에게 시선을 올렸다. 스스로도 제 입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오는 건지 모르는 상태였다.
“내가 해줄까요?”
불행론
*범죄와 폭행 및 반인륜적 행위등의 소재를 포함하고 있으니 열람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샘플에는.. 안 나왔습니다..)
*2015년에 있었던 황우 교류회에 제출했던 원고입니다.
“그럼 실례입니다만, 아카시씨.”
카사마츠는 수첩을 훌훌 넘기며 물었다.
“어제 오후 5시경엔 어디에 계셨죠?”
맞은편의 청년이 시선을 아래로 던지며 천천히 대답했다.
“어제 그 시간엔 집에 혼자 있었습니다. 료타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죠.”
“그걸 증명해줄 사람은 당연히 없겠군요?”
반가운 소리라는 듯이 달려드는 다른 젊은 형사-모리야마에게 청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를 의심하시는 거군요.”
“형식상 하는 질문입니다. 관계자들에겐 모두 물어보고 있어요.”
“그 관계자라는 게 누구죠?”
“그건 수사상의 기밀입니다.”
청년은 수사상의 기밀, 하고 우습다는 듯이 되뇌었다. 심야의 병원 복도는 불빛이 어두워, 그 표정은 잘 알 수 없었다.
“좋습니다. 동기는 뭐죠? 제가 왜 료타를 죽여야 하죠?”
“그게, 아카시씨.”
카사마츠는 한 번 말을 끊어 다음에 올 말을 강조했다.
“아카시 마사오미씨의 아들이시죠? 6년 전 키세 료타군의 부친, 키세 소우타씨가 해친.”
“………….”
입을 다물고 있던 청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불합리하지 않습니까.”
“예?”
“아버지가 살해당했으니 제게 살해동기가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건 좀 어폐가 있는 표현이군요.”
“피해자 유족은 잠재적 범죄자란 말씀인가요?”
“그렇게 말씀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지요.”
“그럼 혹시, 키세씨가 원한을 살만한 일은 있었습니까?”
모리야마가 페이스를 빼앗길라 끼어들 듯이 물었다.
“없습니다.”
청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딱 잘라 말하시는군요. 어떻게 단언하실 수 있습니까?”
“키세가 계단에서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는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
“누가 료타를 죽여야 했는지.”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응시했다. 생각에 잠긴 모습에 모리야마는 당황했지만, 카사마츠는 개의치 않고 물었다.
“그럼 질문을 바꾸죠. 키세 료타씨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병원 복도에 정적이 감돌았다. 시선을 형사의 얼굴로 올렸던 청년은 이윽고 잠시 시선을 떨어트린 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이렇게 서두를 열었다.
“불행해지기 쉬운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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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 세이쥬로가 아버지를 잃은 것은 13세의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아무런 징후나 조짐도 없었던 것 같다. 그 날, 퇴근 시간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회사로 전화를 걸자, 비서는 이미 아버지가 퇴근했음을 알렸다. 아버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불길한 예감을 했을지도 모르지만, 세이쥬로는 아버지의 외도를 의심하며 어머니를 안심시키려 했다. 곧 오실 거예요, 어머니.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서야 아버지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외도를 해도 좀 더 요령 있게 하는 남자였다. 경찰의 인도를 받아 시체 안치실에서 아버지의 얼굴을 확인하며 세이쥬로가 생각한 것은 그런 것이었다. 무언가에 머리를 세게 부딪쳐 뇌출혈로 사망에 이르렀다. 아버지치고는 너무나 별 볼일 없는 죽음이 아닌가.
쓰러져 우는 어머니에게 형사는 원한을 품을 만한 인물이 있냐고 성급하게 물었다. 어머니는 남편이 살해당한 거냐고 물었고, 세이쥬로는 그런 인물은 산더미만큼 있지 않겠냐고 대꾸했다.
정작 쓸 만한 증언은 비서에게서 나왔다.
“실은 지난달에 구조조정이 있어서……정리해고당한 사원들 중 한 명이 아닐까요?”
아카시 마사오미는 세계 유수의 대기업에서 사장자리를 물려받은 남자였다. 대놓고 말해 원한관계가 없는 것이 더 어려울 거라고 당시의 수사원들은 추측했다. 그의 몸에서는 몸싸움의 흔적도 발견되었다. 그러나 정리 해고를 당한 전국의 사원들은 다 합쳐 2천명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과연 어깨를 떨어뜨리고 한숨을 쉬었을 것이다.
피해자의 인간관계를 쫓는 방면의 수사와 별개로 당일의 행적을 쫓는 수사가 동시에 행해졌다. 그 날, 아카시 마사오미는 정시에 출근하여 업무를 보고, 점심은 시의원의 접대로 모 요정에 방문했고, 그 후에는 회사에 돌아갔다가 정시에 퇴근하였다. 비서에게는 특별한 언질도 없었고, 전용기사도 물리치고 직접 차를 몰았다. 기사는 그런 일은 종종 있었다고 증언했다.
“……측근들끼리는 언제 그런 류의 스캔들이 터질까봐 항상 대비하고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그런 류의 스캔들이란, 즉 여성문제였다. 그러나 정작 이야기를 꺼낸 기사와 모든 행적을 파악하고 있어야 마땅할 비서를 털어보아도 입을 열지 않고, 가족에 이르러서는 금시초문이었다.
행적에 대해서도 퇴근 이후의 발자취는 발견되지 않는 채로, 수사는 난항에 빠졌을 때 그 소년이 나타났다. 자신의 아버지의 손을 잡고.
Alright
*웹 공개했던 글의 재록입니다. 전문은 me2.do/xNkw4zCS 비밀번호 http://me2.do/FbWr8Qhb ISBN 끝4자리
“손도 잘 묶어줘요.”
“손도?”
반쯤 질린 목소리를 내는 아카시 앞에, 키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는 이미 눈가리개를 둘러 동그란 뒤통수부근에서 꼭 묶여있었다. 아카시가 묶은 것이 아니다. 아카시의 허가를 받고 자기 손으로 묶은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을 묶어달라고 한다. 이 역시도 스스로 묶을 수 있다면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한다.
“이왕하기로 한 거니까 뭔가, 제대로 하고 싶잖아요.”
“‘제대로’라…….”
지금 이 공간에 제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원한다면 해주기로 한다. 그의 말마따나 이왕하기로 한 것이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환상에 부풀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해보고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전까지는 포기하기 않겠지. 그렇다면 현실을 보여줄 뿐이다. 이 경우, 눈을 가리기 때문에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해주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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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 아카시 세이쥬로는 ‘색기’라는 말을 싫어했다. 예를 들어 미역이나 생강절임을 싫어한다는 것처럼 싫어했다. 어디 가서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어디선가 그런 말이 들리면 혼자만 내심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진심으로 저속한 언어라고 생각했다. 간혹 키세가 실린 잡지의 선전 문구가 그를 그따위 말로 포장하고 있는 걸 보자면 어디에 토해내야 좋을 지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의 연인을 그런 시선으로 본 적도 없었고, 그런 식으로 미디어에서 취급당하는 것에 깊이 분개하고 있었다. 그만두게 할 수 있는 거라면 애초에 그만두도록 모든 조치를 취했을 것이나, 그걸 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키세였고 아카시는 키세의 자유의지를 존중했다. 아카시 본인이 하는 모든 일 역시 키세의 마음에 들 수 없지만 키세가 그걸 용인해주듯이, 자신 역시 한 두 가지 탐탁찮은 것이 있더라도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이다. 모델일 만이 아니다. 그 밖에도 키세가 하고 싶은 거나 원하는 것은 다소 내키지 않더라도 어지간한 것은 들어주는 편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게 잘못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야기는 심야에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키세가 무릎을 꿇고 쇼핑백을 내밀었을 때 시작되었다.
“정말로 하고 싶어?”
나는 정말로 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를 포함해 다시 한 번 확인하자, 키세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생일대의 소원임다.”
“……료타, 그런 말을 가볍게 하지 말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아카시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도 당연했다. 대체 이 일이 키세의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고 사정할 만한 일은 아닐 게 분명하다. 이 역시 아카시가 들어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을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선수를 친 거겠지만.
“아카싯치, 전 진지함다.”
“왜 료타의 진지함은 이런 일에 소비되어야 했어?”
“눈이 안 보이는 만큼 다른 감각에 집중하게 돼서, 하여간 장난 아니래요.”
“물론 장난이 아니지, 료타. 무척 이상한 행위잖아.”
“그검다, 그거! 그런 이상함에 끌린다고나 할까……, 평범하지 않은 것을 동경하게 된다고나 할까……. 아카싯치도 한 번이나 백 번 정도 이상한 거 해 보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있을 거 아님까! AV 같은 거.”
동성간의 성관계를 평범한 것의 영역에 넣는 키세의 시점이 일단 세간에서 봤을 때는 평범하지 않았지만, 아카시는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생각한 것은 좀 더 앞이었다.
“……매너리즘이란 뜻인가?”
생각지 못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키세가 손을 저었다.
“아, 그게 아님다. 그게 아니라, 새로운 영역에 아카싯치와 함께 도전해보고 싶다는 검다.”
키세가 뭐라고 하거나 아카시는 내키지 않았다.
애초에 키세가 아카시를 제대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교제와 육체관계는 지속되어 왔지만, 삽입함으로써 두 사람이 함께 섹스를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 것은 말이다. 양측의 부단한 노력과 시도가 있었기에 지금에 이를 수 있었다. 아카시는 그 사실이 몹시 기뻤고, 하나의 골에 도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키세는 그 관계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한숨 쉬는 아카시의 앞에 키세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해주면 아카싯치가 해달라는 것도 해 줄 테니까요!”
키세는 양손을 모으며 마지막 카드라는 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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