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 SF(?) 단편집
작가 지망생 쿠로코가 상금 대신 안드로이드 키세를 받는 이야기
너는 고철 안드로이드
Kuroko tetsuya × Kise Ryouta
“여기에 도장 찍어주시면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는 택배기사에게 쿠로코도 수고하십니다, 하고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밝은 미소와 함께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던 쿠로코는 좁은 현관을 거의 꽉 채운 거대한 택배상자에 시선을 옮겼다.
보통 택배라는 것은 기다리고 기다려서 받는 것이건만, 쿠로코의 태도는 떨떠름했다. 그것도 그럴 만했다.
쿠로코 테츠야는 작가 지망생이다. 등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공모전 준비를 병행하며 살기를 3년. 입선조차 해본 적이 없는 쿠로코는 슬슬 통장잔고가 위험해져, 이번에는 자존심도 접고 모 성인지 전문 출판사에서 연 성인문학상 공모전에 가명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입상했다. 수치스럽지만 상금으로 한동안 먹고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 소규모 출판사는 거짓말처럼 도산했고, 지금 상금대신 쿠로코의 키만 한 상자가 도착한 것이다.
이 사이즈는 필시 세탁기나 그 종류의 가전제품이리라. 현물보다는 현금 쪽이 백배는 좋았지만 그래도 도산했다는 데 어쩌랴. 중고가게에 팔면 그나마 생활비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쿠로코는 힘겹게 박스 테이프를 뜯어내고 상자를 열었다.
그러나 상자 안에는 세탁기가 아닌 다른 것이 들어있었다.
상자 안에 장신의 몸을 구겨 넣은 채 잠들어있는 남자였다.
“………….”
쿠로코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보통사람은 까무러치고도 남았을 이 광경은, 요즘 같은 안드로이드가 많이 보급된 사회에서는 드물지도 않다.
물론 너무 인간과 똑 닮은 나머지,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소름이 돋는 것까진 어쩔 수 없지만.
아니, 소름이 돋은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상자 속의 남자는 몹시 아름다운 형태를 하고 있었다. 결 좋은 금색 머리칼과 티 하나 없는 피부, 오똑한 콧날, 긴 속눈썹. 얼굴선도 곱고, 옷을 입고 있어 잘 알 수 없지만 몸도 다부져보였다.
쿠로코는 손을 뻗어 뺨을 만져보았다. 거의 인간의 피부와 흡사한 감촉. 그러나 온기는 없었다. 목 뒤로 손을 돌려보니, 목덜미부분에 음각된 글자가 만져졌다. 안드로이드라는 증거. 그리고 그 조금 윗부분을 만져보면, 뼈처럼 도드라진 부분이 하나 있다. 그 부분을 3초간 누르니, 안드로이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긴 속눈썹 아래 감춰졌던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이 똑바로 쿠로코를 향했다. 쿠로코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안드로이드는 다음 순간 부드럽게 웃더니 말했다.
“내 이번 주인님?”
“……일단은 그렇게 됩니다.”
쿠로코는 힘들게 목소리를 짜냈다.
“헤에, 꽤 어린 주인님이네요. 아, 맞다, 자기소개! 나는 KSRT. 키세 료타라고 불러주세요.”
“KSRT?”
“모델명임다! 아마도. 키세도 료타도 환영이에요! 주인님은?”
“저는 쿠로코 테츠야입니다.”
이 친화력은 대체 뭘까. 쿠로코는 지금부터 나는 너를 중고 가전제품상에 팔러갈 것인데, 도저히 너를 들고 갈 수 없으니 제 발로 함께 가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전원을 넣은 것뿐이다.
“그럼 키세군 부탁이 있습니다만…….”
“앗, 그 전에 잠깐만요, 여기 와이파이 터지나요?”
키세는 성급히 굴지 말라는 듯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쿠로코의 말을 막았다. 쿠로코는 눈을 깜빡였다.
“와이파이를 쓰나요?”
“지금 내장된 자체 네트워크가 없거든요. 으음? 옛날엔 있었던 거 같은데 이상하네. 그래서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뭐예요?”
대화를 진행하는 데에 있어서 네트워크 연결이 필요한 것인가? 동기화가 필요한 기능이 있는건가? 쿠로코가 망설이며 비밀번호를 말해주자 키세는 응응, 하고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밝게 웃었다.
“우와, SM물을 좋아함까? 그런 거 싫어하는 타입도 있는데, 나여서 다행이네요. 가능한 맞춰줄테니까 걱정 말아요.”
“무슨 검색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만하세요.”
그리고 맞춰주긴 뭘 맞춰준단 말인가요.
검색을 멈추게 하려고 해도 어느 부분을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명령하면 그만두기는 하는 지, 키세는 입술을 비죽였다.
“중요한 일 아님까? 사용자의 성벽을 파악해두는 건 러브돌의 기본임다?”
“그건 제 성벽이 아니고 공모전을 위한……. 지금 러브돌이라고 했습니까?”
“러브돌이라고 했슴다?”
“키세군은 러브돌인가요?”
“러브돌임다?”
그 말은 쿠로코를 충격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가정용 안드로이드도 아니고 러브돌이라니 어떻게 된 일인가. 아무리 성인문학상이라고는 해도 러브돌을 상품으로 보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어떻게 되먹은 일인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러브돌을 어느 중고 가전제품상에서 취급해준단 말인가.
의식이 몸을 빠져나가려는 쿠로코를 키세가 붙잡았다.
“음……저기, 일단 이것저것 설정부터 해두고 싶은데, 괜찮슴까?”
“설정……무슨 설정이 필요한가요?”
“언어는 일본어로 OK죠?”
“다른 언어도 되나요?”
“바디랭귀지라면 됨다!”
물어보는 의미가 있는 건가. 일본어조차 불안해보이는데.
“……일본어로 해주세요.”
“나한테 새 이름을 지어주고 싶으면 그래도 되는데 원하는 이름 있슴까?”
“없습니다.”
“그럼 디폴트구나.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호감도 설정 어떡할래요?”
“호감도……. 지금은 디폴트인가요?”
“앗, 아님다! 예전 주인이 리셋하지 않고 보내서 그 때 설정 그대로예요.”
“그런가요. 디폴트 상태가 되면 어떻죠?”
“음 조오금 쌀쌀맞아지려나?”
“그럼 그거로…….”
“아앗, 역시! 쌀쌀맞게 굴다가 사소한 계기로 점점 러브러브로 옮겨가는 전개가 최고로 모에하다고 대호평임다. 쿠로콧치도 그거 희망?”
여기서 쿠로코는 수많은 의문점을 떠올렸다. 안드로이드에게서 츤데레를 요구하는 인간의 심리란? 최고로 모에하다고 대호평이라니 누구한테서? 쿠로콧치? 쿠로콧치가 누구죠?
“쿠로콧치는 쿠로콧치인 게 당연하잖슴까~. 저는 존경하는 사람에게는 경의를 잊지 않는 남자거든요!”
마지막 의문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낸 모양이었다.
“그런 값싼 존경 원하지 않습니다. 그 호칭, 호감도를 디폴트로 돌리면 없어지나요?”
“응? 이거? 이건 제 개체 설정임다. 호감도가 디폴트여도 똑같……앗, 잠깐만요, 그거 지금 한숨 쉴 포인트임까?!”
*
검색 해본 바, 기본적으로 개봉된 안드로이드들은 종류와 타입을 가리지 않고 해당 안드로이드의 제조사 대리점에서 매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쿠로코는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키세를 대리점에 데려가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키세의 제조사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키세의 모델명으로 추측되는 KSRT라는 타입은 아무리 검색해보아도 아무런 자료도 나오지 않았다. 개조된 불법적인 안드로이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안드로이드들은 옥션 등에서 판매할 수 있기는 했다. 물론 기본적으로 불법이지만.
열심히 검색하는 쿠로코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키세는 뺨을 긁적이더니 한 마디,
“미안.”
하고 말했다.
그 후로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고, 쿠로코의 유유자적한 혼자만의 생활은 더 이상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녀왔습…….”
“쿠로콧치! 어서 오세요! 수고했슴다!”
아르바이트를 마친 쿠로코가 지친 몸을 이끌고 현관문을 연 순간부터 이 모양이다.
미리 현관에 나와 있던 키세가 달려들어 쿠로코를 끌어안은 덕에 쿠로코는 말도 맺지 못하고 중심을 잃었다. 그걸 키세가 쓰러지기 전에 솜씨 좋게 붙잡고는 한다는 말이 이거다.
“일단 밥부터? 아니면 목욕? 그것도 아니면…….”
눈을 찡긋하는 키세를 밀어내며 쿠로코는 단호히 말했다.
“식사하겠습니다.”
“엣.”
“식사요.”
“…….”
“키세군, 식사하죠.”
“알겠슴다…….”
쿠로코의 단호한 태도에 키세는 풀이 죽어 말꼬리를 늘인다. 흡사 토라진 강아지다. 강아지라기 보단 대형견에 가까운 사이즈지만.
키세는 기본적으로 식사가 필요 없다. 안드로이드도 인간의 식사가 가능하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함께 식사를 하고 싶어 하는 인간을 위한 기능으로, 안드로이드에게는 의미가 없다. 그보다 더 좋은 에너지 공급방식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쿠로코도 딱히 권하진 않는다. 그런가하면 키세가 밥을 차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쿠로코가 혼자서 밥을 차려서 먹는 것을 키세는 옆에서 눈을 빛내며 쳐다볼 뿐이다.
감당할 수가 없달까, 처치곤란하달까.
키세의 장점을 꼽아보자면 일단 잘 생긴 건 확실하다. 그러나 그 밖에 딱히 활용도는 없다.
키세군은 뭘 할 수 있나요? 하고 본인에게 물어보면,
“쿠로콧치가 원하는 플레이는 뭐든지 해드릴 수 있슴다?”
하며 묘한 눈빛을 쏜다.
“그거 말곤 없습니까?”
“엣, 그거 말고? 음……. 가사 전반! 다 잘함다!”
“딱히 필요 없습니다. 제 일은 제가 할 수 있습니다.”
“무거운 물건도 잘 들고요, 힘도 센데요!”
“음……그건 좀 도움이 되겠네요. 한정된 상황 하에서만요.”
“가, 감상용…….”
“………….”
그렇다면 솔직히 말해 세탁기가 나을 뻔했다.
쿠로코는 존재감이 약하기는 해도 사회성이 결여된 인간은 아니다. 러브돌로 사용하기 위해 안드로이드를 구입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인간 애인을 만들지 못하고, 또 그 노력도 하기 싫어 안드로이드로 도피하는 부류다. 쿠로코는 딱히 그 정도로 애인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키세는 남자를 연애 대상으로 본 적이 없는 쿠로코조차 잠깐 설레게 만들 정도로, 인간으로써는 타고나기 힘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기는 했다. 그러나 외형이 좋다고 꼭 사랑에 빠지리란 법도 없다. 공업용이 아닌 안드로이드를 사업장에서 활용하는 것은 불법이니, 키세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시킬 수도 없는 노릇. 집안일을 시킨다면 그럭저럭 할 지도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집이 이렇게 좁으니 청소도 할 게 없고, 밥도 쿠로코만 먹으면 되며, 빨래는 3일에 한 번만 돌려도 될 수준이다.
쿠로코에게 딱히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키세도 알고 있다. 때문에 더욱 쿠로코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안달이고, 그 결과 더더욱 쿠로코를 성가시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하다못해 러브돌로써 사용되고 있기라도 하다면 모를까, 쿠로코는 그 방면의 사용에는 완전히 무관심했다. 쿠로코로써는 그렇게 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에 도출되는 사명감을 띈 행동들이나 아무 이유도 없이 주어지는 애정들은 부담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후략)
버디 컴플렉스 au 커플러 양성소의 훈련생 키세와 아오미네
퍼펙트 콤플렉스
Aomine daiki × Kise Ryouta
※《버디 콤플렉스》 au
뭐야, 이 사람. 뭐야, 이 사람.
-키세군, 괜찮습니까?
쿠로코의 목소리도 어딘가 먼 곳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두근거리는 스스로의 고동을 키세는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찬 것도, 땀이 나는 것도 아닌데, 그저 기분이 몹시 고양되었다. 아아, 이 감각을 실전에서 맛보고 싶다. 이 사람. 이 사람과 함께라면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키세는 콕핏을 뛰쳐나갔다.
*
키세 료타는 레이크 루이즈 커플러 양성소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유명인이 되었다. 물론 그 외모의 빼어남 때문이기도 했지만, 주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의 커플러로써의 소질에 특이한 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21세기 초 발견된 에너지 자원 넥토리븀은 세계질서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대량의 매장자원을 가진 대국 조길리아는 팽창을 거듭했고, 이에 대항하는 자유조약연합 사이의 전쟁은 2088년 현재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자유조약연합은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파일럿들이 뇌파를 공유함으로써 서로의 어빌리티를 최대로 끌어내는 시스템을 개발했다. 한 번 비참한 희생을 내고 실패했던 계획은, 시간이 지나 몇 가지의 개량을 통해 부활했다. 그리고 그 커플링 시스템을 적용한 인간형 로봇 발리앤서를 조종할 ‘커플러’를 양성하는 곳이 바로 레이크 루이즈 커플러 양성소다.
키세 료타는 그 레이크 루이즈 커플러 양성소에서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그게 저 녀석이지? 100% 카피한다는 녀석.”
“……그래, 불쌍하게 됐지 뭐냐.”
드문드문 들려오는 말소리에 키세가 뒤를 돌아보지만, 정작 목소리의 주인들은 키세 본인보다는 자기들 이야기에 빠져 키세의 시선을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일일이 열을 내는 것도 귀찮아져서, 키세는 식기를 대충 정리하고 식당을 뒤로 했다. 남은 오후의 일정은 시뮬레이션 훈련이지만, 이것도 어차피 별 볼일 없는 일과에 불과하다.
물론 처음부터 훈련을 시시하게 여긴 것은 아니다. 오퍼레이터인 쿠로코 테츠야에게 구조된 것으로 계기로, 입대하여 커플러 양성소에 배정받아 쿠로코와 재회하고 훈련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는 나름대로의 사명감도 있었다. 쿠로코에게 구조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구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금부터는 인생이 달라질 거라는 예감도. 그것이 변질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키세는 상대가 어떤 파형이든 그 파형을 완벽하게 카피하는 체질이었다. 첫 커플링 테스트에서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이 체질은, 그러나 곧 치명적인 결함임이 밝혀졌다. 초기형이었다면 정신붕괴를 일으켰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어떤 파형이든 매칭이 100% 가능하다는 것은, 상대방의 파형이 표준 파형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본래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심하게 흐트러지지 않을 파형이, 키세와 커플링하면 금세 표준 파형에서 벗어난다. 어떤 파형이든 키세는 맞춰주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커플링만으로도 파형은 크게 흐트러진다. 이것은 큰 문제다.
자신의 파형을 가능한 표준 파형에 가깝게 만들어 어느 전장에서 어느 커플러를 만나더라도 나이스 커플링 반응을 띄울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한 커플러. 키세와 커플링하는 것은 비약적인 능력치 상승을 기대할 수는 있지만, 키세 외의 다른 커플러와 커플링을 할 수 없게 된다면 의미가 없다. 그렇게 되고 싶은 커플러는 단 한 명도 없으리라.
키세는 한숨을 쉬고 시뮬레이션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실은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 누구와도 커플링이 불가능한 상태가 이어진다면, 이런 훈련을 받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는 것을.
*
“안녕, 쿠로콧치, 나에요.”
-키세군이군요. 잠시 조정을 할 테니, 기다려주세요.
키세가 탑승한 시뮬레이션 훈련장의 훈련용 발리앤서는 여러 명의 훈련생이 사용하기 때문에 매번 가벼운 조정이 필요하다. 조정실과 연결된 스피커에서는 오퍼레이터인 쿠로코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키세는 콕핏 바깥의 황량한 훈련장을 보았다. 시뮬레이션이 시작되면, 저곳이 필드로 바뀔 것이다.
“네엡.”
-……잠시만요. 아쥬르에서 생체 반응 확인.
뭐? 키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시뮬레이션에서는 인공지능으로 대체하기로 한 커플러의 발리앤서에 다른 훈련생이 탑승했다는 것이다.
-아쥬르 탑승자, 성명을 밝히세요.
“여어, 테츠. 나다.”
통신이 켜지더니,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했다. 쿠로코와는 잘 아는 사이인 듯 편한 말투인 게 키세는 거슬렸다.
-아오미네군. 지금은 키세군의 시뮬레이션 중입니다. 아쥬르에서 이탈하세요.
“그거 말인데, 이대로 진행하면 어때?”
-예?
“이 녀석 때문에 한 명씩 밀려서, 나는 훈련마다 인공지능이랑 커플링하고 있다고. 멀쩡한 커플러가 있는데 왜 그럴 필요가 있냐?”
-키세군은 특수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아오미네군은 이미 다른 훈련생들보다 높은 수준의 시뮬레이션에 돌입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그거 두 개 한 번에 하는 편이 경제적? 인 거 아니냐?”
즉 아오미네는 키세와 자신을 커플링시키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키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기요, 듣자 듣자하니까, 아오미네? 군?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슴까? 여기 훈련생이라면 자랑은 아니지만 내 이름 들어봤을 텐데요.”
“엉? 알고 있어. 파형 100% 카피로 유명한 키세군이지?”
“그렇다고요. 당신, 여기 에이스라고 불리잖아요. 파형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어요.”
“난 상관없어. 너야말로 어떤데? 실전에선 발리앤서에 인공지능을 태워 보내진 않아. 이대로라면 넌 실전에 투입되지도 못해.”
“하? 그거야말로 당신하곤 상관없잖아.”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에, 키세는 저도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쿠로코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그러나 정작 아오미네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니? 상관있는데. 나는 100% 매칭될 커플러가 필요하니까. 근데 이 양성소엔 없거든.”
“그거야……! 굳이 100%가 아니어도 폭넓은 커플러와 커플링 되는 편이 훨씬……!”
“100%가 아니면 0%도 99%도 똑같아.”
뭐래는 거야, 대체, 이 사람은. 키세는 이 사람의 머릿속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콕핏 안에서 키세는 주먹을 꼭 쥐었다.
“나 말고 다른 커플러랑은 커플링 못하게 되는 수도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100%냐 90%냐 고르자면 당연히 100% 아니냐?”
“쿠로콧치, 이 사람 바보예요?!”
-그러게요. 헌데 키세군이 할 말은 아닙니다.
키세가 반박하려고 했을 때였다. 쿠로코가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니지무라 교관께서 두 사람의 시험 커플링을 허가하셨습니다. 테스트 없이 바로 시뮬레이션을 진행하겠습니다만, 아오미네군, 정말로 괜찮습니까? 단 한 번의 시험이라도 파형이 얼마나 달라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상관없어.”
“잠깐, 내 의견은?! 무시임까! 저런 막무가내랑 무슨 커플링이에요!”
“시끄러, 좀 조용히 해라. 너도 인공지능보다야 살아있는 인간하고 커플링 하는 편이 재밌잖냐?”
이 자식……. 머리가 좋은 놈인 거 같진 않은데 묘하게 반박할 수 없는 게 열 받는다. 콕핏에서 내려서 맨몸으로 만나면 꼭 한 대는 쳐야겠다고 키세는 다짐했다.
-발리앤서 부대, 발진.
쿠로코의 목소리와 함께 시뮬레이션은 개시되었다.
(후략)
키세가 20년 후의 아카시를 만나는 이야기
민들레 소년
Akashi seijurou × Kise Ryouta
눈을 뜨니 모르는 천장이 보였다.
키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은 어두웠지만, 달빛이 들어와 어느 정도는 주변을 식별할 수 있었다. 오늘은 분명, 평소처럼 아침연습에 얼굴을 내밀고, 수업을 듣고, 농구부 활동을 하고 돌아와 잠들었다. 그러나 눈을 뜬 곳은 처음 보는 방, 처음 보는 침대 위였다.
으음, 하고 신음하며 키세는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꿈일까. 꿈이라기엔 잠에서 깬 감각이 너무나 선명하다. 그럼 잠든 사이 누군가 자신을 여기로 옮긴 건가? 그렇다면 그게 납치든 뭐든 누군가 어떤 목적이 있어서 데려온 것일 텐데,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몸을 구속하는 것도 없다. 일단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에 조용히 문을 열고 나오자, 다시 긴 복도가 나타났다. 계속 걸어가니, 이번엔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조심조심 내려가 보니, 다시 아무도 없는 거실이 나왔다. 이렇게 넓은 집에서 사람 한 명 만나지 못하다니.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도망쳐야하는 거야? 키세는 곤혹해져서 으응, 하고 신음했다.
“어떻게 된 거야……?”
“왜 그래, 키세?”
그 때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는 키세도 잘 아는 것이었다. 키세는 반가움에 재빨리 뒤를 돌았다.
“아카싯……치……?”
그러나 거기에 서 있는 건 키세가 알던 아카시보다 조금 더 어른스러운 분위기에, 키도 한 뼘 정도 자란 미청년이었다. 그는 쓴웃음 짓더니 말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위 아래로 훑어보는 건 어떨까 싶다만.”
“아아, 미안……이 아니라, 정말로 아카싯치?!”
아카싯치라는 단어에 마치 제 이름처럼 반응하는 점이나 이목구비가 똑 닮은 점은 그렇다고 치지만, 키세가 아는 아카시의 사이즈보다는 미묘하게 컸다. 게다가 어딘가, 뭐랄까, 관록이 있다고 할까, 부드러웠던 뺨과 턱의 윤곽도 날카롭게 변하고, 눈빛도 깊어져서 완전히 어른으로 보였다. 이건 꿈인가? 다시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키세가 입을 뻐끔거리고 있자, 아카시가 눈썹을 찌푸렸다.
“키세야말로 어쩐지 어려진 것 같은데…….”
말하고 나서 깨달은 듯, 아카시는 아아, 그런가, 그 녀석, 하고 중얼거리더니 미간을 짚었다.
“응? 미안, 뭐라고?”
“키세는 좀 전까지 어디에 있었어?”
“저 안쪽 방에…….”
“그 전에.”
“우리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키세의 현재 연령은?”
“왜, 왜 그래요, 알잖슴까……열다섯인데.”
“키세는 지금 미래로 온 거야.”
“미래?”
“그래. 키세의 시점에서 보자면 20년쯤 후일까.”
“에, 아니, 뭐, 뭔 소리예요. 20년?!”
아카시가 키세를 위해 가능한 알게 쉽게 설명한 이야기는 대강 이랬다. 지금 키세가 있는 이 시대에는 인간의 시공좌표를 이동하게 해주는 기술, 그러니까 타임머신 비슷한 것이 있는데, 하나의 좌표에 동일인물이 두 명 존재하게 할 수는 없다. 때문에 한 사람이 시공을 이동할 때에는, 대상이 되는 시공의 자기자신과 좌표를 서로 뒤바꾸는 식으로만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라면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관리국의 허가를 받은 후에 감시 하에 행해야한다만.”
“에……그러니까, 지금 이 시대의 내가 과거에 가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반동으로 미래에 와 있다?”
“잘 이해했구나. 시간이 지나서 키세가 돌아오면 너도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으니까, 꿈이라도 꿨다고 생각해.”
키세는 미묘한 기분으로 그 설명을 들었다. 이 시대의 나, 너무 무계획한 거 아님까. 아니, 그래도 아카시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리라고 생각한 건가. 확실히 아카시가 나타남으로 인해서 훨씬 불안은 줄어들었지만.
“보통 좌표가 교환될 때는 곧장 이쪽으로 넘어온 사람의 의식을 잃게 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의식이 있는 채로 미래를 볼 수 있는 키세는 운이 좋은 편이네.”
“아카싯치는 나 기절 안 시켜도 됨까? 나 이대로 미래의 지식을 과거로 가져가버릴 지도 모름다?”
“나로썬 별로 상관없어. 그럼 다른 평행우주가 생길 뿐이니까.”
“평……?”
“요컨대, 타임 패러독스는 없다는 거야.”
“타임……헤, 헤에, 그렇구나.”
평행 우주도 타임 패러독스도 알아듣지 못한 키세였지만, 이 정도로 설명하면 알아들었겠지, 라는 자애로운 표정의 아카시 앞에서 두 번이나 못 알아들은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저 시간이 지나면 과거로 돌아갈 뿐인 키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카싯치, 20년 지나면 이렇게 되는구나. 엄청나게 멋있슴다.”
“……어른을 놀리지 마.”
그 말에 기분이 나빠진 듯 아카시가 말했지만, 키세는 그 말도 재밌는지 계속해서 떠들었다.
“아하하, 굉장해, 참 지금은 아카싯치가 나보다 스무 살 많았지. 아, 그러고 보니 여긴 어딤까? 아카싯치네 집? 아카싯치 아직 결혼 안 했구나.”
혼자 살긴 너무 넓지 않슴까? 하고 혼자 떠드는 키세를 아카시는 재밌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잘 알았네. 또 알아낸 건 없어?”
“응? 알아낸 거?”
키세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아카싯치네 집에 자러 온 검까? 라기 보다, 20년 후에도 아카싯치랑 연락하고 있다는 것부터 신기한데.”
그러자 아카시는 키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신기할 것도 없어. 키세하고 나하곤, 그런 사이니까.”
“그런 사이라니, 어떤 사이임까?!”
“말하지 않으면 모르겠어?”
“힉?!”
왠지, 얼굴이 가까웠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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